초록을 머금은 자연이 일렁이며 생동하는 어느 주말, 전시를 보러 집을 나섰습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빛낸 25명 작가의 작품을 모은 전시였죠. 이중섭의 ‘황소’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는데, 전시장에서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양한 그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굴곡진 시절을 살아온 화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을 통해 민족의 얼이 새겨진 한국 미술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죠. 한국 고유의 정서를 독자적인 화풍으로 표현한 예술가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김환기부터 박수근, 그리고 장욱진까지.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미술관 3곳을 소개합니다.
양주 시립 장욱진 미술관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하여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
_장욱진
양주 시립 장욱진 미술관은 순수하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추구한 장욱진 화백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자 2014년 개관한 미술관입니다.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절제된 선과 색으로 단순함의 미학을 실천하며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동물이나 자연, 가족 등의 소재를 소박하고 정감있게 그려냄으로써 동화같이 따스한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미술관은 그의 예술 세계를 반영하여 건축되었는데요. 푸르른 언덕 위 우뚝 솟아있는 새하얀 건물은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삶과 작품 모두에서 심플함을 추구한 그의 성향을 살려 외벽과 지붕은 흰색 폴리카보네이트 재질로 제작되었죠. 빛의 흐름이 느껴지는 1, 2층 규모의 커다란 유리창으로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요. 이는 자연과의 공명을 중시했던 그의 미술 세계를 반영하고자 설계된 것입니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연결된 다양한 각도의 공간과 계단은 미로같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요. 최-페레이라 건축사무소에서 설계한 독특한 구조의 장욱진 미술관은 2014년 김수근건축상을 수상하고 영국 BBC가 꼽은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내부에는 벽화부터 유화, 판화 등 장욱진의 작품 230여 점이 주제 및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으며, 기획 전시도 개최되어 근현대부터 동시대 작가의 작품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인근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장흥 조각공원이 있어 함께 둘러보며 자연 속 휴식을 가져보아도 좋겠습니다.
주소: 경기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
영업 시간: 화~일 10시~18시 (월요일 휴무)
WEBSITE : 장욱진미술관
INSTAGRAM : @changucchin
환기미술관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라.
_김환기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한국적 소재를 서구적 모더니즘에 접목한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 화가입니다. 그는 달과 산, 구름 같은 자연부터 항아리 등의 전통 기물을 세련되고 서정적인 조형미로 그려냄으로써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죠. 환기미술관은 그의 예술 세계를 기리고자 1992년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 작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서울 부암동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은 총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물 외관에는 한국적 재료인 화강암을 사용하여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습니다. 반달 모양의 독특한 지붕은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김환기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죠.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하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메인 전시가 열리는 3층 본관은 높은 층고가 인상적인데요. 네모난 건물 창문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빛은 간접 조명 역할을 하며 공간에 개방감을 더해줍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마주하게 되는데요. 푸르른 바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쪽빛 그림은 무수한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는 캔버스에 하나씩 점을 찍으며 그리운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본관 옆 별관에선 기획 전시와 아트샵을 구경할 수 있고,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는 달관에서는 김환기의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감상을 마친 이후엔 주변 산책로를 걸으며 여운을 곱씹어 보는 건 어떨까요.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영업 시간: 화~일 10시~18시 (월요일 휴무)
WEBSITE : 환기미술관
INSTAGRAM : @whankimuseum
양구 군립 박수근 미술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_박수근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서민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 그는 단순한 선과 화강암을 닮은 회백색 질감 기법으로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가난하고 소박한 서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내며 인간의 선함과 진실한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인물이죠. 2002년 개관한 박수근 미술관은 그의 고향이자 생가 터인 강원도 양구 정림리마을에 세워졌는데요. 화강암을 쌓아 건축된 성벽 같은 외관은 박수근 특유의 투박한 색감과 질감에 영감을 받아 건축되었습니다.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생생히 구현한 미술관은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2003년 한국건축가협회상과 2006년 강원도 경관우수건축물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박수근 미술관은 지난 20여 년 동안 기념 전시관부터 현대미술관, 파빌리온, 어린이미술관, 라키비움까지 총 5개의 전시관을 건립하고 각 공간의 정체성을 살려 운영하고 있는데요. 전시장에서는 박수근의 대표작인 “빨래터”, “아기 업은 소녀”부터 유화, 수채화, 판화 등 여러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한국 근현대 주요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모아 기획 전시도 개최하고 있죠. 야외에는 그의 작품 속 빨래터의 모습을 재현한 장소부터 산책하기 좋은 자작나무 숲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근처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박수근과 김복순 부부의 묘소도 있어 박수근의 생애와 발자취를 오롯이 살펴볼 수 있죠.
주소: 강원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영업 시간: 화~일 10시~18시 (월요일 휴무)
WEBSITE : 박수근미술관
INSTAGRAM : @parksookeun_museum
그동안 서양 화가들의 작품에만 익숙했다면 이제는 한국화와 조금 더 친해져 보는 건 어떨까요? 무더운 여름, 주변 자연 경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나들이를 떠나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