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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지 않는
증명사진

증명사진에는
과연 우리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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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보안 검색은 항상 곤혹스럽다. 초조하게 앞사람이 보안 검색을 통과하는 걸 지켜보며 신분증을 한 손에 꼭 쥔다. 손에 들어있는 신분증이 유달리 미덥지 않다. 결국 차례가 다가오고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신분증을 내민다. 보안 검색요원이 평온한 얼굴로 신분증을 훑어본 후 내 얼굴을 확인한다. 미묘한 불신의 표정이 그 평온을 해치고 요원의 얼굴에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직업적 정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요원의 복장보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 그의 직업을 읽는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나를 내 사진에서 읽어낼 수도, 내 얼굴에서 읽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는 표정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도 나는 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지를 차례로 다 읊고 나서야 보안 검색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증명사진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거기서 어색하게 웃지만 말고 뭐라도 말해보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당연히 사진은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무엇도 스스로 증명해내지 못한다. 증명사진이라고 불리는 주제에 무엇을 증명하고 있냐는 원망이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른다. 내가 사진보다 조금만 더 너저분하게 옷을 입어도, 내가 사진보다 조금만 더 멀끔하게 차려입어도 사진은 나를 증명하지 못하고 만다. 결국 증명을 하는 건 나 자신이다. 그런데 내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나라는 사실이 아니다. 내가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건 내가 저 사진, 저 사진이 인쇄된 플라스틱판과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사진의 노에마:
이게 그것이야!

도대체 우리는 왜 증명사진이 우리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일까? 그 확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진으로 누군가를 증명하는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진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믿어져 온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카메라
이미지 출처: Unsplash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런 동작의 끝에 있다. ‘그것은 그것, 그거야, 이게 그것이야!’라고 말하지만, 그 외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_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밝은 방』

사진에 대한 글을 펴낸 많은 이론가가 사진과 회화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대개 사진의 본성을 회화와의 차이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역시 사진에 대한 자신의 저작 『밝은 방』에서 비슷한 접근을 취한다. 롤랑 바르트는 회화는 현실을 보지 않더라도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바르트가 지적하는 사진의 한계는 바로 사진이 렌즈 앞에 놓인 것만을 지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가 포토샵이 생겨나기 이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포토샵 1.0이 1990년에 발매되었는데, 바르트는 1980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 노에마가 ‘그것은-존재-했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진의 지표성은 초기 사진의 화학적 메커니즘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초기 사진은 햇볕에 노출된 우리의 피부에 그을음이 남는 것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다. 여름에 손목시계를 차고 밖을 쏘다니면 손목시계가 채워진 부분을 제외한 피부가 점차 타서 손목시계의 흔적이 남듯, 초기 사진은 금속판에 빛이 닿으면 부식이 일어나는 것을 이용해 앞에 놓인 물체의 흔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진의 생성 원리 때문에 사진은 그 본성이 인간에 의한 대상의 재현에 놓인 회화와 다르게 카메라 앞에 놓인 존재 자체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여겨져 왔다.

조지프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 Point de vue du Gras”,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게른샤임 소장, 텍사스 대학 인문학 연구소, 오스틴
조지프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 Point de vue du Gras”, 1827년경, 엘리오그라프, 게른샤임 소장, 텍사스 대학 인문학 연구소, 오스틴.

이처럼 놀랍도록 정확하게 대상의 유사상(analogon)을 드러내는 사진이 발명되자, 사람들은 열렬하게 반응했다. 1839년 1월 6일 일간지 『가제트 드 프랑스 Gazette de France』는 사진의 초창기 발명가 중 한 명인 루이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카메라 속에서 재현되는 자연상의 그 정직성과 믿음직함을 상상해보라. 거기에 덧붙여서 하이라이트로부터 그림자에 이르는 그 중간 명암의 전 과정으로 이미지를 붙잡아 놓은 태양광선의 작용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면, 누구나 다게르 씨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이 바로 어떤 것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그것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서툴고 미숙한 인간이 아닌 전능한 태양광선의 손을 빌려 앞에 놓인 대상의 상을 정직하고 믿음직하게 남기는 획기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믿음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심령사진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왜 심령사진을 오싹하게 생각하고, 이를 찍으러 떠나기도 하고, 혹은 그 심령사진이 어떤 우연, 어떤 실수에 찍힌 것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진이 지시하는 것은 항상 현실이라는(혹은 현실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또 다른 문제 역시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저 사진이 진짜일까?”라는 질문이 우리 사회를 떠다니고 있다) 우리는 유령을 그린 그림을 보고 유령의 존재를 믿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회화 속 유령을 마주할 때 우리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유령이 찍힌 사진은 우리에게 유령의 존재를 믿거나, 혹은 그 사진 자체를 믿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마치 중세 사람들이 예수의 수의에 찍혔다는 예수의 진상, 즉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믿음을 사진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화가 미상, 에데사의 타데우스로부터 예수의 수의를 받는 아브갈 왕, 944년경, 납화, 성 캐서린 수도원
화가 미상, 에데사의 타데우스로부터 예수의 수의를 받는 아브갈 왕, 944년경, 납화, 성 캐서린 수도원.

신원확인을 위한 사진:
베르티옹 카드

알퐁스 베르티옹의 머그샷.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 사진이 파리 경시청에서 최초로 찍힌 머그샷이다.

이러한 ‘사진의 진실함’에 대한 믿음은 사진이 인간식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사진을 이른 시기 인간식별을 위해 대대적으로 사용했던 사람이 바로 19세기 파리 경시청의 알퐁스 베르티옹(Alphonse Bertillon)이다. 베르티옹은 범죄자의 신원을 감식하기 위해 머그샷(mug shot)이 부착된 베르티옹 카드를 발명한다. 그는 범죄자의 정면사진과 측면사진을 찍어 범죄자 신원 카드에 부착했다. 베르티옹은 최초로 범죄자의 버스트 샷을 신원 카드에 이용했을 뿐 아니라, 균질한 범죄자 식별 사진을 얻기 위해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촬영거리, 조명, 렌즈 규격을 표준화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베르티옹의 규격화된 촬영 방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우리가 증명사진을 찍는 방법이 베르티옹의 촬영 방식과 결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사진 규격안내
여권사진 규격안내. 이미지 출처: 외교부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 건 능숙한 사진사에 의해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체감하긴 힘들지만, 우리의 증명사진은 꽤 많은 규격을 준수하고 있다. 근대 이후 법률사회는 개인에게 수많은 조건을 통제한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진을 찍게 만들고, 또 이를 부착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다니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진만으로 누군가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분증이 사진 외에 주민등록번호, 지문 등 우리에 대한 다른 정보 역시 싣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베르티옹 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만으로는 범죄자의 식별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베르티옹은 범죄자의 신체를 측정해 그 기록을 사진 위에 적어 놓는다. 베르티옹이 더 정확하게 범죄자를 다른 사람과 구분한다고 믿었던 것이 바로 이 신체 측정기록이었다. 베르티옹이 진실로 믿었던 것은 카드 위에 부착된 두 장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식별 시스템 그 자체였다.


증명사진이 잃어버린 두 가지:
식별가능성과 인물 그 자체

사실 한 장의 사진은 그것이 나타내는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나 닮아있다. 왜냐하면 닮음은 가소롭고, 순전히 민사적이고 심지어 형사적인 것으로 된, 인물의 동일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물을 신분상의 ‘인물로서’ 제시하는 반면에, 나는 인물 ‘그 자체’이고자 한다.

_롤랑 바르트, 『밝은 방』

따라서 근대 법률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데 사진을 이른 시기부터 이용한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그 시도가 결코 효과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우리는 베르티옹 카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증명사진이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단지 식별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책무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사진들을 뒤져보며 되찾고자 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만의 온전한 분위기, 랑드 지방 해변에 서 있는 젊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서야 발견할 수 있었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본질은 아마 증명사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증명사진에 부재하는 것은 인물의 식별가능성뿐 아니라 그 사진에 찍힌 인물 자체다.

바닷물
이미지 출처: Unsplash

나는 증명사진과 친구가 찍어준 사진을 나란히 책상 위에 올려서 둘을 번갈아 바라본다. 두 사진 모두에서 나는 흰 상의를 입고 얼굴과 어깨 부근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사진이 내게 드러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왼쪽의 증명사진이 내게 보여주는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하나의 인물이다. 증명사진에서 나는 사회 속의 개인을 닮아있다. 화질로 미루어보아 이것은 21세기에 찍은 사진일 것이다. 아니면 정교하게 복원을 한 사진이던가. 그리고 나는 이 4.5cm×3.5cm 크기 사진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매번 애를 쓰고 있다. 그 외에는 도무지 이 규격화된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속의 곧은 자세도, 옅은 미소도, 단정하게 빗은 머리도 사진 속 인물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오른편에 놓인 친구가 나를 찍은 사진에서 나는 사진을 찍은 친구의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낀다. 내 친구는 내 빗장뼈 부분을 유심하게 바라본 것 같다. 사진을 볼 때 내 시선이 사진 속 얼굴이 아니라 그 부근에 먼저 머문다. 그리고 나는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목을 조금 오른쪽으로 돌려 살짝 위를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에 끝에는 조금 불쾌함이 스며있다. 사진 속의 내가 왜 눈을 조금 찌푸리는지에 대한 이유는 곧 알 수 있게 되는데, 머리 위에 유달리 빛이 강한 전등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진에서 내가 강한 빛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약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읽는다. 사진을 보기 전에는 잊고 있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찡그림이 신체적 약함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조금 유쾌한 놀림거리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나는 사진을 통해 내 친구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발견한다. 이런 모든 이야기, 그 시간 그 장소에 그 사람이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했다는 사진의 호소, 어쩌면 사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증명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즉석 사진’ 종류의 ‘객관적 사진’이 가진 이미지의 무거움을 없애주는 것이 오직 사랑, 지극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도 내 증명사진과 친구가 찍어준 나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사랑이 정형화된 이미지의 무거움을 몰아내고, 내 존재를 다시 얇은 종이 위로 돌려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과연 지극한 사랑만이 이미지의 무거움을 없애주고 있을까? 무언가 다른 것이 이미지의 무게를 들어내고, 혹은 지나치게 들어내고 그 이미지를 가벼움 그 자체로 변모시켜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놀라운 사진 편집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사진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 절대적인 특징이라고 믿어져 왔던 진실성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글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고, 사진의 식별가능성이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그 자리를 어떤 것이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동문선, 2006.
  • 보먼트 뉴홀, 사진의 역사, 열화당, 2003.

유진

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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