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적이지만 가장 진입 장벽이 높은 장르, 뮤지컬. 시공간의 제약은 물론 찰나의 순간에 비싼 값을 치러야 해 유독 시작이 망설여지는 문화예술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뮤지컬을 가장 경제적이고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바로 공식 음원으로 제작된 ‘뮤지컬 앨범’을 듣는 것인데요. 보통 뮤지컬은 극장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녹화·공유를 잘 하지 않고, 유튜브에 올라오는 자료도 특정 장면 몇 개만 부각한 짧은 영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뮤지컬 앨범엔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공연이 담겨 있습니다. 한 회차 무대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록물이죠. 재생 버튼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를 맛보기 할 수 있는 귀한 뮤지컬 앨범들을 소개합니다.
- 뮤지컬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넘버’라고 지칭합니다.
- 한 곡으로도 여러 캐스팅의 다양한 해석을 들어보며 자신의 최애 배우를 찾아보세요!
밀도 있고 웅장한
대극장 스테디셀러 <지킬앤하이드>,
[2021 Korean Cast Recording]
겉과 속이 다른 이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하는 고유명사, 지킬앤하이드입니다. 극을 직접 보지 않았어도 ‘지금 이 순간’ 정도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만큼 익숙하죠.
지킬앤하이드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극적으로 분출되는 작품입니다. 사람의 본성에서 선과 악을 분리한다는 내용처럼 많은 감정들이 다각도로 보여집니다. 아련한 로맨스와 분노의 야성, 심지어 비이성적인 집착과 쾌락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런데 유명한 만큼 실황을 공개하는데 인색했던 작품이 2022년 대코로나 시대에 믿을 수 없는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조승우, 류정한, 홍광호. 지킬앤하이드의 정체성을 책임지는 대배우들의 목소리로 극 전체를 녹음한, 그런데 무려 세 사람 버전이 각각 출시된 녹음 앨범이었죠. 극장에 가지 않고도 ‘삼(3) 지킬’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만큼 종일 재생할 수 있다니. 엄청난 기회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밀도 높고 묵직한 넘버를 추천합니다.
#4. Facade 1
귀족과 천민. 계급을 시각화하며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합창곡.
#11. Alive 1
갓 탄생한 악의 결정체 하이드의 과열과 분노가 폭발하는 곡.
(#8부터 #11까지 기승전결을 갖고 이어지는 씬입니다.)
#18. Dangerous Game
하이드의 야성에 속수무책으로 유혹 당하는, 섹슈얼하고 매혹적인 곡.
#21. The Confrontation
지킬과 하이드, 두 자아가 만나 하나의 몸 안에서 씨름하는 곡. 배우의 진수가 돋보이는 최고의 하이라이트.
(감상 포인트: 곧은 성품의 지킬 vs. 야만적인 하이드가 창법으로 대비됩니다. 정박을 지키는 지킬과 악보를 무시하며 소리 지르는 하이드가 특히 대비되는 구간―홍광호 버전의 1:19―을 주의해서 들어보세요. 이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결국 본능에 잡아 먹히고 마는 섬세한 연기도요!)
[2021 Korean Cast Recording] 앨범 상세 페이지
아기자기하고 달달한 멜로디,
소극장 터줏대감<김종욱 찾기>
OST
회전문 덕후(끝없이 회전문을 돌듯 한 작품을 반복 관람한다는 덕질 은어)가 유독 많은 대학로 중소극장 공연으로 가볼까요? 17년 째 혜화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 <김종욱 찾기>입니다. 한국 뮤지컬 최초로 영화화가 된 만큼 오랜 시간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공연이죠.
익숙한 제목, 다 아는 줄거리에 가려져 음악을 지나치기엔 아쉬움이 큽니다. 스윙재즈를 기반으로 한 가볍고 발랄한 멜로디가 소극장의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담뿍 담아냈으니까 말이죠.
특히 앨범이 녹음된 2006년 초연은 이젠 너무나 유명해진 이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졌습니다. 엄기준과 오만석, 오나라가 바로 그 첫 남녀 주인공이었는데요. ‘나라의 결심’이란 유명한 곡이 사실 오나라 배우의 본명에서 따온 것이었다니, 그녀가 드라마 <스카이 캐슬>로 유명해지기 전에도 뮤지컬계에선 인정받는 탑배우였다는 사실이 다시금 체감되는 순간입니다.
#1. Destiny
“운명은 달나라에 있지 않아요~!” 1인 다역 멀티맨의 유쾌한 길잡이 노래.
#3. 김종욱 Song
“아~ 저 턱선의 외로운 각도! 아~ 저 콧날의 날카로운 지성!” 첫눈에 반해버린 나라의 콩깍지 세레나데.
#7. 한양서 김서방 찾기
만석과 나라의 티격태격 티키타카! 오묘한 화음이 돋보이는 곡.
#14. 나라와 만석의 Love Theme
포근하고 발랄한 로맨스가 이뤄지는 순간.
김종욱 찾기는 오늘 소개할 뮤지컬 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작품입니다. 오픈런(끝나는 날짜를 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언제든 대학로에서 볼 수 있고, 이커머스에서도 할인 티켓을 상시 판매하죠. 검증된 퀄리티에 부담없이 뮤지컬을 접하고 싶다면 단연 김종욱 찾기입니다!
미국 입양아의 시선으로 본 한국,
그리고 최재림<에어포트 베이비>
OST
최근 뮤지컬 <시카고>와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으로 단숨에 주목받은 배우 최재림의 진짜 매력이 가득 담긴,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안다는 희귀작입니다. 특히 스승 박칼린이 연출을 맡고 특별출연을 하며 호흡을 맞췄는데요.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 당한 청년 조쉬 코헨이 생모를 찾아 온 한국에서 겪은 일종의 모험기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이 문화 차이를 겪으며 느끼는 당혹스러움, 이태원의 LGBTQ 사회, 인종차별과 재개발이란 시사 문제까지 다루며 소수자를 대하는 섬세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흔히 말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의 시점으로 낯선 대한민국을 돌아볼 수 있는 창의적인 수작입니다.
#1. Airport Baby
“어렸을 적 난, 모든 아기들은 공항에서 태어난다 생각했어.” 막 한국에 발을 디딘 조쉬의 오프닝 넘버. 시원시원한 최재림의 목청이 돋보입니다.
#2. Different (Like I’m Different)
한국인은 영어 발음을, 외국인은 한국어 발음을 어려워하는 모습을 통해 각자의 문화 차이를 재치있게 비교한 합창곡.
#4. 워쪄쓰까잉
드디어 찾은 외삼촌이 혀를 끌끌 차며 말합니다. “Watch out sky..?” 뭐라는 거죠?
정신질환자 가족의 내밀한 고백,
<넥스트 투 노멀> OST
정신질환자를 일원으로 둔 가족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16년 째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와 ‘평범한 가족’이 되기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아빠. 모범적이고 늠름한 아들과 오빠에만 기울어진 관심에 비뚤어진 딸. 각 구성원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환각 속 교모히 숨겨있는 반전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음악은 격정적이고 대담하며 인물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락 사운드로 경쾌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알앤비 피아노로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솟구치게 합니다.
CD1) #9~10. 넌 몰라, 바로 나
“신문 부고란을 볼 때마다 질투해 봤어?” 엄마 다이애나의 우울과 분노가 가감 없이 표출됩니다. 남편 댄은 그녀를 보듬어 주려 하지만 둘은 계속 엇갈립니다.
CD1) #12. 난 살아있어
차세대 남배우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곡입니다. 매끄럽게 몸을 쓰면서도 또렷한 발성이 필요한 넘버로 앨범이 녹음된 초연 당시 한지상과 최재림이 아들 ‘게이브’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CD2) #3. 헤이 1 & #7. 헤이 2
“야-” “…어.” 어색하게 주고받는 풋풋한 사랑과 위로의 메아리가 흩어집니다.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몇 곡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뮤지컬이란 것의 매력을 서서히 알아갈 수 있습니다. 지극히 경제적이고 일상적인 방법이죠. ‘방구석 1열’이란 TV 영화 프로그램명처럼 뮤지컬도 나만의 공간에서 내 방식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감상 이후 그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면 직접 극장을 방문해 볼 수도 있겠죠. 처음 보는 공연에서 귀에 익숙한 넘버를 만날 때의 반가움, 상상만 하던 장면이 마침내 배우의 신체에서 구현되는 걸 목격하는 희열 찬 순간을 마주할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 다시 이 앨범들을 듣노라면, 헤어나지 못할 만큼 무한히 반복하게 될 거라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