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풀숲에 방치된 새끼 수달들을 발견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됐는지 한뼘도 안 되는 몸통에 복슬복슬한 털만 짧게 나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새끼 수달들은 오랫동안 못 먹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서로에게 기댄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다. 설상가상 나무 위에선 매처럼 보이는 새가 지그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당신은 수달을 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연의 섭리라고 치부하고 못 본 채 지나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끼 수달들을 구하는 선택을 내릴 것이다.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은 우리의 내재된 본능 중 하나이며,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한다. 환경 운동가들이 많은 시간을 써가며 동물을 구조하는 SNS 영상을 보며 행복과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특히 그렇다. 바다거북의 코에 박힌 플라스틱 빨대를 빼내는 영상이라던지, 바다사자의 목덜미를 파고든 밧줄을 잘라내는 영상 등은 1억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현재까지도 수많은 응원과 감사의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촬영가들 사이에선 ‘어떤 경우에도 자연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불문율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다큐멘터리 촬영가라면 매가 수달들을 한 마리씩 낚아채 둥지로 배달하고, 뜯어먹는 동안 영상을 찍고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촬영가들 사이에선 어기면 민망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선한) 일반인들이 납득하기엔 아직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이 글에선 ‘관찰’과 ‘개입’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딜레마를 다뤄보려 한다.
다큐멘터리, 자연을 담은 교과서
북유럽 인근 툰드라 지대에 사는 설치류 ‘레밍쥐(Norway Lemming)’는 ‘집단 자살’을 하는 특수한 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먹이가 부족한 이른 봄이면 수백 마리의 레밍쥐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바다로 뛰어들어 죽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이 이런 안타까운 자살 행위를 벌이는 이유는 생물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개체 수가 너무 많아지며 먹이가 부족해지고, 다 같이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후손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만약 윗 문단을 별다른 의심 없이 (혹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반갑게) 읽었다면 당신 역시 조작된 다큐멘터리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레밍쥐의 집단자살레 관해 설명한 부분은 생물학계에서 오래 전 폐기한, 틀린 이론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를 믿으면서 군중심리 등을 이야기할 때 인용하곤 한다. 레밍쥐가 종 보호를 위해 집단자살한다는 낭설이 퍼진 건 1958년 디즈니가 제작한 ‘하얀 황야(White Wilderness)’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해당 영상에는 레밍쥐들이 정말 머뭇머뭇 거리다 한 마리씩 바다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장면은 바다가 아닌 캐나다 앨버타주의 한 강에서 촬영됐으며, 레밍쥐들이 물에 빠진 건 집단자살이 아닌 제작진이 기계를 이용해 레밍쥐들을 강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1982년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제작진이 레밍쥐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사실도 함께 폭로됐다.
다큐멘터리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 정보를 주는 교육적 목적이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어원(Docere)부터 ‘가르친다’는 뜻이 포함돼 있으며, 정보의 80%를 눈으로 얻는 인간에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다만 그만큼 위험하다. 우리는 직접 본 것을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고, 눈을 통해 각인된 정보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촬영가들의 개입 금지 대원칙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사실이 왜곡되고 이것들이 대중에게 그대로 각인될 우려가 있다는 공감대 속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레밍쥐 사례 말고도 동물원에서 북극곰이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마치 자연 속에서 찍은 것처럼 조작하는 등 조작 논란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유야 무엇이 됐든 다큐멘터리의 교육적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놓고 조작하지 않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동물의 감각은 예민하며, 다큐멘터리 촬영자의 존재를 알아챈 순간 행동은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담을 수 없고, 그만큼 교육적 기능은 떨어진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서 위장하는 기술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 테다.
“개입으로 고통 받은 동물 없었다”
이처럼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는 자연에 개입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지만, 오히려 다큐멘터리의 교육적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소한 조작’ 혹은 ‘세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2000년대 국내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수리부엉이가 야생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세트를 구성하고 토끼의 발을 묶어 정해진 장소에서 사냥이 이뤄지도록 했다. 일각에서 수상한 점을 포착하고 조작 의혹을 제기했는데, 당시 책임 프로듀서는 이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모든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경이로운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세트 촬영과 인위적인 설정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이것 역시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의 관행이자 불문율”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사소한 조작이 없었다면, 우린 지금도 국내 수리부엉이의 사냥 장면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불문율을 대놓고 어기고도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경우도 있다. 영국 BBC 자연 다큐멘터리팀 ‘다이너스티(Dynasties)’ 제작진은 2018년 남극에서 황제펭귄들을 촬영하던 중 한 무리의 펭귄들이 협곡 좁은 틈에 갇혀 이도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은 모습을 발견했다. 협곡 경사는 펭귄들이 오를 수 없을 만큼 가팔랐고, 펭귄들은 영하 60도를 밑도는 추위에 꼼짝 없이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불문율을 지켜야 할지 고민하던 제작진 눈에 들어온 것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죽어가는 새끼 펭귄들이었다. 더는 방관할 수 없다고 느낀 제작진은 한 가지 타협안을 떠올렸다. 직접 펭귄들을 들어올려 구조를 해주는 대신 펭귄들이 협곡을 알아서 걸어나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내주자는 것이었다. 결국 제작진은 촬영을 중단한 뒤 삽을 들었고, 펭귄들이 오르기 충분한 경사로를 만들었다. 잠시 뒤 펭귄들은 완만한 경사로를 통해 협곡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월 로슨(Will Lawson) 촬영감독은 관련 인터뷰에서 “우리는 눈앞에 놓인 상황만 두고 생각했다. 원칙은 생각하지 않았다”며 “우리의 결정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옳은 결정을 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온라인서에도 이들의 결정을 지지하는 반응이 잇따랐다.
하지만 BBC는 이듬해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바다로 가는 도중 갈매기에게 낚아채인 새끼 바다거북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았다. 2013년엔 죽어가는 새끼 코끼리를 두고 촬영하고만 있었다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저명한 다큐멘터리 해설가 데이비드 에튼버러 경(David Attenborough)은 “상황 참여자가 되는 것보다는 언제나 관찰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같은 방송사 내부에서도 기준이 달라지는 가운데, BBC의 고위 간부 마이크 건튼(Mike Gunton)은 “개입 때문에 고통을 받을 동물이 없었다. 그들은 펭귄을 건드리지도 않았다”고 항변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을까
동물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개입은 괜찮을까. 문제는 촬영자의 개입이 정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펭귄을 구하지 않았다면 굶주린 바다사자, 탈진해 죽을 위기에 놓인 북극곰 가족이 뜻밖의 포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수 있다. 새끼 거북을 낚아챈 갈매기는 오랜만에 새끼들에게 풍족한 식사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 속 모든 먹이사슬은 포식자와 피식자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중 다른 쪽에 안 좋은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한쪽에만 좋은 영향을 줄 구 있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동물을 오래 연구한 과학자들도 인간의 개입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쉽게 가늠하지 못한다. 눈 주변 검정 무늬로 ‘바다의 판다’라고 불리는 바키타(Vaquita)는 현재 전 세계 10마리도 남지 않은 희귀종 돌고래다. 멸종의 문턱에 놓인 바키타를 이대로 둘 수 없다고 느낀 환경 단체와 학자들이 합심해 바키타를 구조해 보호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만큼 탐색부터 구조작업까지 모두 신중하고 세심하게 진행됐지만, 구조된 바키타는 구조 당일부터 매우 심각한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다가 얼마 못 가 폐사했다고 한다. 물론 워낙 희귀한 탓에 충분한 사전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원인도 있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인간의 개입이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 개체군에 대해서도 이렇게 모르는데, 여러 생물군이 촘촘한 그물처럼 얽힌 복잡한 생태계 속 인간의 개입이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온전히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관찰과 개입의 딜레마
관찰과 개입의 딜레마는 비단 자연 다큐멘터리 속 동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아프리카 사진 작가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내전으로 인한 기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1993년 수단으로 향했다. 카터는 수단의 한 구조캠프에서 앙상하게 마른 소녀를 그녀보다 큰 독수리가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재빨리 구도를 잡았다. 그가 찍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수단 문제와 아프리카 식량난을 모든 사람들에게 톡톡히 각인시켰다. 카터는 이 사진으로 이듬해 퓰리처 상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허기진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고 찍을 생각부터 했냐며”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카터는 촬영 직후 독수리를 쫓아냈다고 해명했고, 현장에 있던 동료들도 그를 옹호했지만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뭇가지보다도 얇은 소녀의 팔뚝을 보면, 독수리가 날아들어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만약 카터가 곧바로 개입해 아이를 구했다면 충격적인 사진도 찍히지 않았을 테고, 비난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단의 참상을 널리 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카터는 대신 관찰자로 남길 선택했고, 큰 비난을 받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찰과 개입의 딜레마.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보도 윤리를 논할 때마다 인용되며 첨예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고 한다.
망설임 없이 새끼 수달을 구한 당신에게 다시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다큐멘터리 촬영작가 또는 사진작가로서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때는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 서울신문, “동물세계에 개입하면 안 된다. 하지만 펭귄을 죽일 순 없었다”, 2021.03.31
- 경향신문, KBS 환경스페셜 “조작? 자연다큐 촬영 불문율”, 2009.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