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어둠을 밝히는 파수꾼
카프카의 숨겨진 단편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뜨리는
카프카의 도끼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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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사회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은 환경과 집단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반면 그 환경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에 난폭하게 부여해 주는 정의, 규제, 한계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없다면 도리어 집단 속의 아웃사이더가 되고 맙니다. 카프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진정한 자유와 고유한 자아를 찾기 위해 차갑고 날 선 방식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카프카가 지향한 ‘좋은 책’의 기준, 즉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카프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새 방치해두고 있었을지 모를 내 삶의 방향과 소속을 다시금 아로새겨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아티클에서는 그의 어떤 배경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런 소외의 경험이 드러난 작품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황당한 줄거리, 감정도 논리도 없는 인물들, 냉랭한 설정, 갈피를 잃은 문체를 마주하더라도 그 본질에 어떤 생각이 담겨있는지 알고 있다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법 앞에서』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_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이미지 출처: 민음사

시골에서 온 사람 하나가 법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문지기를 찾아옵니다. 문지기는 시골 사람의 청을 거절합니다. 문지기는 이 문을 통과시켜 줄 수는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막강한 문지기들이 있을 거라고 경고하죠. 시골 사람은 문지기를 재차 설득해 보고, 안을 들여다보려 슬그머니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며 문지기를 매수하려 해보지만 소용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문 앞에서 지쳐 죽어갑니다.

시골 사람이 법을 찾으러 온 본래 사연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어느덧 문을 지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채 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 문은 오직 시골 사람만을 위한 문이었는데 말이죠. 시골 사람은 이 문지기가 단 하나의 장애라고 원망했지만, 과연 문지기가 장애물이었을까요? 자신을 위한 문, 혹은 문 너머의 세계를 얻는 데 필요했던 건 시골 사람 자신의 강력한 의지와 행동력이었을지 모릅니다.

문
이미지 출처: unsplash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고 있나요? 무엇을 위해 법과 같은 ‘수단’을 필요로 하고 있나요? 무엇 필요로 하는지도 잊어버린 채 눈 앞의 장애물을 탓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소중한 시간과 생명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눈앞의 상황만 쫓으며 흘러가다가 빠르게 흘러가 버린 나의 삶을 섬뜩한 기분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귀가』, 『승객』, 『골목길로 난 창』

이 세계, 이 도시, 나의 가족 안에서 나의 위치를 헤아려 보니 여지없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 어느 방향에서든 내가 이러이러한 권리를 마땅히 내세울 수도 있을 거라고는 나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_프란츠 카프카, 『승객』

프란츠 카프카 단편선
이미지 출처: 현대문학

고된 날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귀가’라는 단어가 주는 안락함은 집을 곧 안식처로 여기는 이의 특권 같은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승객』의 화자는 어딘가로 가고 있긴 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신의 위치를 헤아리며 자조합니다. 그저 전차에 실려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자기 존재의 불안과 소외를 느끼고 있죠. 『골목길로 난 창』의 화자도 어디든 끼어보고 싶어 하는 쓸쓸함을 사뭇 드러내며 독백합니다. 이렇게 도시, 공동체, 민족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상실과 소외감이 현상이 되어 드러난 작품이 『귀가』입니다.

『귀가』에서 집에 돌아온 화자는 집의 구성원, 물건, 공기마저도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분명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고 누군가를 위한 커피가 끓고 있는데 ‘물건 하나하나가 그 나름의 용무에 골몰하기라도 하듯 냉랭하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에게는 집에 대한 두려움까지 느껴집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화자에게는 지금 집은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안락한 공동체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안락하게 느껴야 마땅할 ‘가족’과 ‘집’이라는 집단이 누군가에게는 철저히 소외감과 공포를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카프카의 그림
카프카의 그림, 이미지 출처: GRANTA

여기서 카프카의 배경을 생각해볼까요. 카프카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억압받았던 집이라는 공간이 그에게 절대 평온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소년 카프카에게 아버지의 귀가는 곧 아버지의 기분을 기민하게 살펴 극도로 몸을 사려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혹은 모진 지적과 이유 없는 비아냥을 감내해야 한다는 암시였습니다. 성인이 된 후 카프카에게 귀가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생활을 부모님께 판단, 검열받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고요.

중요한 점은, 카프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인만큼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카프카는 아버지께 지대한 부정적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감정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카프카는 단절에 짓눌려 문 앞에서 망설이다 지쳐 죽기보다는 문을 열고 질문을 던지며 ‘귀가’를 완성하기를 택한 사람입니다. 그런 작가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냉랭한 공기에 굳은 채 문 앞에서 멈춘 이야기 속 화자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택하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됩니다. 당신은 이 열린 결말을 어떻게 매듭짓고 싶나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되풀이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방했습니다.”

_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카프카의 작품 중 『변신』의 화자는 벌레입니다. 어느 날 인간의 몸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이야기인데요. 만만찮게 흥미로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화자는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자기 인생을 인류 지성 최고의 집단인 학술원에 보고합니다. 사냥 원정대에게 붙잡혀 인간 사회에 오기까지 겪은 감금의 날들과 인간 문화와 관습을 체화하게 된 경험까지 낱낱이 설명하죠. 어째서 인간의 언어까지 완전히 구사하고 음주 문화까지 똑같이 행동하는 원숭이가 탄생하는 지경이 되었을까요. 원숭이는 어차피 바다 위 배에서 탈출해봤자 자신이 고향에서 누리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수는 없을 테고, 이미 인간 사회에 덜어진 이상 그대로 원숭이 정체성을 갖고 있어봤자 죽거나 동물원에 갇히거나 서커스 원숭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라는 위대한 감정 대신 일상적인 용어로 ‘출구’를 택했다고 말합니다. 원숭이는 ‘진보’했습니다. 혹독한 매질로 자신을 감독하면서 유럽인 평균치 교양에 도달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보를 덤덤하게 학술원에 보고합니다.

‘몸’은 정체성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몸의 특징으로 사람을 구별 짓기도 합니다. 거기에 나쁜 의도가 들어가면 구별에서 불필요한 차별과 더 큰 비극을 양산하기도 하죠. 카프카가 살던 시대는 몸이 곧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말해주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카프카는 유대인이었는데요. 서구화된 유대인일수록 더 남성적이고 아리아인다운 체격을 가져 당대 주류인 유럽 사회에 완벽히 녹아들고자 했습니다.

The Dots, Yunmeng YU
이미지 출처: The Dots, Yunmeng YU

이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카프카의 작품 속 주인공의 몸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암시합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의 주인공이 원숭이라는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고 주류인 인간 사회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잔혹한 학대의 경험은 그 시대 비주류에 속했던 민족들에게 낯선 일이 아닙니다. 원숭이는 인간과 다름없는 언어를 구사하며 일반인과 맞먹는 지능을 지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원숭이로 취급받습니다. 『변신』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해왔던 공은 사라지고 가족의 골칫거리 벌레로 취급받는 정체성을 취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 부여받은 몸에 따라 한 사람의 존재 의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카프카를 비롯한 당대 서구 유럽에는 피나는 노력으로 주류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더라도 결론적으로는 이도 저도 아닌 정체성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심정으로 처절하게 작품을 써 내려갔을 카프카의 심정이 느껴지시나요? 이 작품은 문단에 소개된 후 특히 유대인 공동체에서 극찬받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카프카의 작품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이 혹독하다는 뜻이 아닐지 싶어 착잡합니다. 어디서도 확실한 정체성을 찾지 못했던 상실과 소외의 경험이 담긴 카프카의 작품들에 공감한다는 것을 반겨야 할지, 염려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는 사면이 막힌 벽과 같은 삶에서 한계 앞에 좌절해 무릎을 꿇는 사람도, 환상 속의 즐거움을 손에 쥐고 죽어가는 사람도, 진정한 자유 대신 출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도 만나게 됩니다. 카프카는 이 중 어떤 방법이 정답이라고 판결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신이 열렬한 투쟁에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고, 우리 또한 매번 반항에 성공하지는 못하기에 마냥 해피엔딩 같은 결말만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겠죠. 대신 카프카는 각자에게 할당된 인생이라는 벽을 깨는 도끼를 품은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해주는 편을 택합니다. 그 때문에 유약하긴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삭막한 이야기 속에 희미한 불빛을 남겨놓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환상 속 세계에서 길을 잃을 것 같은 카프카의 책을 덮고 질문해 봅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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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고전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방황하고 반항하며 만드는 담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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