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음악과
들리는 음악

BGM이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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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오피스
이미지 출처: BlogTo

최근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공유 오피스를 렌탈했다. 매일 일하는 곳이 달라지는 프리워커로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은 카페였다. 개인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카페를 전전하다 이 방법이 피곤하다고 느낀 순간, 곧장 공유 오피스를 계약했다. 혼자 작업하지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종의 출근과도 같은 의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 공간을 드나든 지 한 달 남짓 흘렀다.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 오피스를 디자인하는 소리에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점심 후 오후 시간에는 약간의 비트가 있는 로파이(lo-fi) 음악, 퇴근이 가까워 오는 오후 5시 이후에는 재즈, 야근이 이어지는 오후 8시부터는 노래가 빠진 느린 연주곡이 공간을 채운다. 업무 효율을 위해 사무실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일과에 따른 ‘시간’까지 고려한 선곡이다. 음악과 소리, 청취 환경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이 글은 이처럼 공간을 디자인하는 소리들에 주목한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어떤 음악환경, 어떤 소리환경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유비쿼터스 리스닝의 시대

ASPIRE, Lily Allen
이미지 출처: ASPIRE, Lily Allen

현대 소리환경에서 음악을 듣는 방식을 두고 대중음악 연구자 카사비안(Anahid Kassabian)은 ‘유비쿼터스 리스닝’(ubiquitous listening)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음악을 어디에서나 듣는 것이 가능한 현대의 기술 환경을 전제한다. 이 말은 곧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시대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음악을 듣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재생 기술이 발명되기 전, 음악을 들으려면 음악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음악을 연주하거나. 그러니 돈이 아주 많아서 음악가들을 부릴 수 있거나 스스로 쓸만한 연주 실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기술 시대 이전에 음악을 듣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 한정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음악과 소리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가는 백화점, 마트, 카페, 서점, 심지어는 엘리베이터와 공중화장실까지 수많은 공간은 나름의 음악과 소리로 가득하다. 유비쿼터스 사운드의 시대, 우리는 유비쿼터스 리스닝의 방식으로 음악을,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콘서트에 가서 가수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듣고 즐기는 감상 방식과 다르다. 배경음악(Background Music, BGM)으로 익숙한, 이른바 뮤작(muzak)1)은 공간의 전면이 아니라 배경에 놓인다. 이 같은 뮤작은, 역설적이지만, 소리 나지만 들리지 않을 때 가장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1) 뮤작은 카페나 백화점 같은 공간에서 들을 수 있는 배경음악(background music)을 일컫는다. 엘리베이터 음악(elevator music), 환경 음악(environmental music), 기능 음악(functional music)이라고도 부른다. 베이스나 비트가 생략되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상품 마케팅, 소비 촉진을 돕기 위한 음악을 소매상에게 제공하는 미국의 브랜드 ‘뮤작’에서 비롯되었다.


공간을 재구성하는 무형의 소리

음악이나 소리로 특정 환경을 구성하려는 것, 더 적극적으로는, 재구성하려는 관심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잡담, 미팅, 공부, 쉼과 같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찾는 공간인 카페는 음악 선곡이 중요한 장소 중 하나다. 카페의 규모나 드나드는 유동 인구수뿐 아니라 공간의 인테리어와 성격 같은 것까지 다면적으로 고려될 때 음악은 카페 공간의 일부가 된다. 따뜻한 질감의 나무 의자와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흰 벽으로 가꾸어진 카페에서 경쾌한 90년대 댄스곡이 흘러나온다면 그 공간과 소리의 견디기 어려운 이질감에 금방 자리를 뜨고 말 것 같다. 또 다른 예로 백화점에서는 층마다 다른 음악을 내보낸다고 알려져 있다. 고가의 명품이 진열된 층에선 여유롭고 차분한 음악을, 캐주얼 브랜드가 모인 층에는 경쾌한 음악을 들려주는 식이다.a) 공간을 찾는 소비자들의 보편적 취향을 고려한 음악 선곡은 소비자의 발걸음이 가능한 한 오래 매장에 머물도록 붙든다.

Saurce, Michelle Volansky
이미지 출처: Saurce, Michelle Volansky

흥미로운 것은 음악이나 소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공간에까지 우리는 어떤 소리들을 채워 넣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서두에 언급한 공유 오피스 같은 곳이 그런 경우다. 그 공간에는 시간에 따라 다른 장르의 음악이 흐른다. 그 음악은 사무실을 점유한 사람들의 업무 효율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선곡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소음이든 음악이든, 소리가 소거된 조용한 환경보다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에 노출될 때 집중력이 올라간다는 입장은 보편화된 지 오래다. 이른바 카공족이 독서실이나 스터디 카페처럼 적막한 곳보다 백색소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카페를 더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같은 공간의 소리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이고, 들리지 않도록 작용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들리지만 듣지 않는 음악

이미지 출처: iStock

이렇듯 유비쿼터스 리스닝은 공간에 채워진 소리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며 가며 듣는 방식을 일컫는다. 카사비안은 이것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학생들에게 30분 동안 라디오를 듣고 그 경험에 대한 에세이를 써오도록 했다. 한 학생의 글은 평소 자신은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과제를 하기 위해 라디오를 켜고 소파에 앉은 학생은 어느샌가 자신이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라디오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가맣게 잊은 채. 이 일화는 사소하지만, 현대 사회에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다른 활동을 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잊는다.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b)

그런데 의아한 것이 있다. 카사비안은 ‘히어링(hearing)’ 대신 ‘리스닝(listening)’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히어링’은 수동적 듣기, 즉 그저 ‘들리는’ 것을, ‘리스닝’은 능동적 듣기, 곧 주체적으로 ‘듣는’ 것을 뜻한다. 그가 소개한 위 일화만 살펴도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존재 방식을 뒤집는 듣기

이미지 출처: Quora

카사비안의 주장이 새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유비쿼터스 리스닝은 듣는 것에 관한 문제를 넘어 현대의 새로운 주체를 확립하는 적극적 토대를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카사비안은 현대의 이 같은 산만한 듣기 방식이 현대의 새로운 주체, 곧 분산된 주체(distributed subjectivity)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분산된 주체에서 개인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개인적 주체(nonindividual subjectivity)이자 하나의 장(field)을 이룬다. 이 새로운 주체의 장 안에서 개인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뿌리로 수렴되기보다 예측불가능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 뻗어나감은 새로운 것, 다른 것, 차이들과의 끊임없는 결합을 제안한다. 현대의 주체는 고정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 접속하며 무한히 변용한다.

뮤작은 카사비안의 이론과 함께 공간의 적막을 메우는 소리 그 이상이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다른 무엇을 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접촉하는 그 음악은 우리들의 존재 방식 자체를 뒤집는 무형의 힘이 흐르는 장을 형성한다. 그것은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우리 인간을 재정의한다.


현대 사회에 음악은 어디에나 편재한다. 정말로 음악이 업무의 효율과 집중도를 높이는지에 관한 문제를 떠나, 우리 삶이 이토록 음악과 밀접하게 접촉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혹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어떤 음악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음악은 잘 듣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이미 음악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음악을 잘 알거나 모르거나, 음악을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 관계없이, 음악으로 우리의 공간과 환경을 디자인하고, 나아가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욕망은 그 자체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음악적인가2)를 반증한다.

나아가 유비쿼터스 리스닝은 듣는 것의 문제가 우리 존재와 어떻게 접속하는지 시사한다. 뮤작은 지루함을 덜어주고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견디기 어려운 고요함에 어색함을 거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디에나 퍼져 있는 음악은, 그리고 그 음악이 형성하는 소리의 장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우리가 존재하는 모양을 새로이 재구성한다.

2) 음악인류학자 존 블래킹(John Blacking)의 저작 How Musical Is Ma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3)을 인용한 것. 국내에는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 (채현경 번역, 민음사, 1998)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다.

a) 부산일보, [Why] 백화점 층마다 나오는 음악이 다르다는데…, 2013
b) Anahid Kassabian, Ubiquitous Listening: Affect, Attention, and Distributed Subjectivi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8.

  • Anahid Kassabian, Ubiquitous Listening: Affect, Attention, and Distributed Subjectivi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 Brian Eno, “Ambient Music,’ Music for Airports liner notes, 1978.
  • 부산일보, [Why] 백화점 층마다 나오는 음악이 다르다는데…, (201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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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인

음악과 음악활동을 하는
우리에 관해 생각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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