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는 파오차이(泡菜·중국식 야채 절임류)와 구분되는 한국 고유의 음식이지만, 외국어 표기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시는 지난달 27일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동·홍대입구 등 유명 관광지 음식점의 중국어 메뉴판을 점검하겠다고 밝히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 단체여행의 빗장을 풀면서 한국을 찾는 유커(游客·중국인 관광객)가 늘어나는 와중에, 유명 관광지 음식점 대부분이 김치를 파오차이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데 따른 조치였다.
일주일 뒤엔 항저우 아시안게임 경기장 내 음식점에서 김치를 똑같이 오역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국내 교수 등의 항의 끝에 영문명과 설명은 ‘Kimchi’로 정정됐지만 한자명은 라바이차이(辣白菜·중국 동북지방 배추절임)로 변경돼 씁쓸한 끝맛을 남겼다. 그렇다면 김치는 뭐라고 번역해야 맞을까? 농림축산식품부는 10년 전쯤 ‘신치(辛奇)’를 공식 표현으로 마련했다. 발음이 비슷하고, ‘맵고 신기하다’는 뜻이 김치를 잘 나타낸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하지만 홍보가 제대로 안 되며 대중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히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김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잊을 만하면 논란거리로 떠오르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치는 어쩌다 제 이름을 잃었을까. ‘김치 전쟁’의 서막은 약 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조는 파오차이”…
‘김치 종주국’ 논란
김치의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시작된 건 2010년대 중국 정부가 “김치는 중국 파오차이에서 유래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서면서부터다. 물론 중국은 그 전부터 김치를 파오차이라고 번역해 사용했고, 단어만 그렇게 사용할 뿐, 한국 김치와 중국 파오차이는 엄연히 다른 음식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본토에서 아무렇지 않게 혼용된다는 점을 토대로 문화 공작의 밑작업이 시작됐고, 결국 ‘김치 종주국’ 논쟁으로까지 비화되고 말았다.
중국은 2020년 11월 ISO(국제표준화기구) 승인을 받아 중국 파오차이 제조법을 국제 표준으로 삼았다. 중국 관영매체 등은 ISO 승인 사실과 한국의 낮은 김치 자급률 등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원조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국민적 공분이 일자 결국 한국 정부도 진화에 나섰다. 이듬해 1월 농림부는 공식 트위터에 김치와 파오차이의 사진과 설명을 올리고 “중국의 파오차이는 우리나라의 김치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못 박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같은 해 7월 ‘공공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지침’을 개정해 공공 부문에서 김치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 파오차이 대신 신치를 사용하도록 했다.
사실 중국이 승인 받은 ISO 문서엔 국제 표준이 ‘김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고 한다. 이는 2001년 한국 김치가 2001년 일본의 ‘기무치’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CODEX(국제식품규격위원회) 국제 표준으로 채택된 덕이었다.
김치와 파오차이는 엄연히 다른 음식이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동물성 젓갈’의 유무다. 조선 중기인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요리책인 ‘주초침저방’에는 오이를 소금에 절인 뒤 ‘새우젓’과 섞어 담그는 조리법이 소개돼 있지만, 중국에선 이러한 내용을 담은 역사 문헌이 발견된 적 없다. 또한 오늘날 조리법을 봐도 파오차이는 90~95도 고온에서 살균 과정을 거쳐 유산균이 거의 없는 반면, 김치는 저온에서 숙성해 유산균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둘 다 ‘배추 절임’이라는 점을 내세워 뿌리가 같은 음식이라고 주장하기엔 뒷받침하는 근거가 지나치게 빈약한 것이다.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무도 모르는 ‘신치’
공식 번역 표기법이 신치로 변경한 뒤에도 문제는 곧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국내에서 큰 반발이 일었다. 국내 한 대학교수는 문체부의 결정을 철회해달라는 국민 청원을 올렸다. “김치라는 자랑스러운 고유명사를 두고 마치 다른 음식을 개발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단지 중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한국인에게도 낯선 신치라는 단어를 만든 건 생뚱맞다는 주장이었다. 탁상행정, 관료주의의 병폐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중국에 김치를 수출하는 우리 기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중국 정부는 국내 식품업체들이 현지에서 김치를 팔 때 ‘파오차이’로 표기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중국에 수출 또는 생산·판매되는 음식은 중국 식품안전국가표준(GB)에 따른 표기방식과 생산조건을 따라야 하는데, GB는 한국, 독일 등 많은 국가들이 수출하는 절임류 채소를 파오차이로 표기하도록 분류하고 있다. 만약 기업들에 신치 표기를 강제하게 되면 현지 소비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하는 기업들의 입장에선 경쟁력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우려를 의식한 듯, 문체부는 훈령 개정을 발표할 당시 ‘민간 부문에는 훈령 적용을 강제하지 않으므로 사업 환경에 따라 부문에선 자유롭게 번역·표기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국내 음식점들도 마찬가지다. 파오차이나 라바이차이 대신 신치를 쓸 경우, 중국인들이 무슨 음식인지 모를 수 있다. 물론 중국의 행동이 괘씸하지만 한국인들의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생뚱맞은 단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게 맞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말장난 아닌 ‘역사공정’…
“신치 홍보해야”
중국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까. 단순히 김치만 놓고 본다면 과민한 반응이라고 보는 시각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김치, 한복을 포함해 사소해 보이는 문화 공정들의 줄기는 한반도의 역사 자체를 예속하려는 역사공정과 맞닿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국가의 역사적 고유성은 전통·문화 등 그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여러 요소들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그것들을 모두 뺏어버린다면 역사적 고유성마저 찬탈 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당장은 ‘모두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상관 없겠지’ 안일할 수 있지만, 한 세대가 지나고, 왜곡된 사실을 모르는 다음 세대가 온다면 그때도 우리 문화의 고유성은 점차 희석돼갈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신치라는 표현을 공식화한 만큼, 지금부터라도 대대적으로 홍보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할 수 있지만, 사진과 함께 신치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잘못된 번역을 엄격하게 계도해나간다면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벗어나 또 다른 자랑스러운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수많은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굳어지는 요즘이다. 변화에 유연한 젊은 세대들의 공감을 얻고, 한류의 힘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다.
이럴 바엔 그냥…
‘김치라고 불러다오’
중국에서 김치는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신치로의 변화가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2010년대 이미 한 차례 실패했던 것처럼 반짝 관심을 받다가 잊힐 수도 있다. 대중의 통상적인 인식과 과 거리가 먼 만큼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다. 다음 번에도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면 그땐 ‘그냥 김치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침내 김치를 김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 동아일보, 명동 음식점 86% ‘김치’=‘파오차이’ 오역, 2023.09.20
- 한국일보, “김치 종주국의 치욕” 주장…中, ‘절임 채소’ 파오차이로 국제표준 경쟁, 2020.11.29
- 세계일보, 中 정부, 우리 김치 제조기업에 현지식 표기 ‘파오차이’ 강제, 2021.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