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배경으로 한
문화예술 작품 세 가지

버려진 공간 안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작품들
Edited by

폐허에는 공간을 짓고 그곳에 머물렀던 인간의 흔적이 겹겹이 스며 있습니다. 폐허는 자신이 통과한 시간을 머금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죠. 더 이상 인간이 살지 않는 공간에서 느끼는 인간의 흔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공간이 머금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귀 기울이고 탐구하게 만들죠. 버려진 공간이 많은 예술 작품에 소재로써, 배경으로써 활용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큐레이션에선 지난 아티클 ‘폐허를 찾아다니는 사진가 헨크 반 렌스베르겐’에 이어 폐허의 아름다움을 문화 예술 작품 속에 녹여낸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독일
‘괴를리츠 백화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폐허 - 독일 ‘괴를리츠 백화점’
이미지 출처: NBC news

결벽적인 대칭 구도와 아름다운 색감으로 영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에 등장하는 호텔 내부는 1929년 지어진 독일 작센주 괴를리츠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현재는 운영이 중단된 이 호텔은 건축됐을 당시의 아르누보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죠. 웨스 앤더슨은 백화점 내부에 영화 세트를 지어, 영화 속 시대 배경인 1930년대 유럽을 충실히 재현합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일부 장면
이미지 출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일부 장면

유적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괴를리츠 지역은 야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의 건축물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외에도 역사나 전쟁을 주제로 한 많은 영화가 괴를리츠 지역에서 촬영되었습니다. 그 덕에 괴를리츠 지역엔 ‘괴를리우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 하니, 영화와 역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가봐야 할 매력적인 장소가 아닐까요?


일본
‘분고모리 기관고 공원’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폐허 - 일본 ‘분고모리 기관고 공원’
이미지 출처: likejp.com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극 중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번째 장소인 이곳은 일본 규슈 오이타현의 분고모리역 인근의 ‘분고모리 기관고’입니다. 증기기관차를 사용하던 시절, 운행을 마쳤거나 수리 중인 열차를 보관하는 창고 같은 역할을 했죠. 1970년대 디젤 기관차의 발달로 제 역할을 다했지만, 역사적인 장소로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일부 장면
이미지 출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일부 장면

각 공간으로 열차를 집어넣기 위한 원형의 홈, 레일을 중심으로 둥글게 감싸 안는 건물의 모양, 여기저기 닳고 깨진 창문은 영화 속에 충실히 반영되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새하얀 문과 그를 감싸고 있는 폐허의 모습은 신비롭고도 강렬한 느낌을 주죠. 이 장소는 영화 포스터에도 사용되며 ‘스즈메의 문단속’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나미비아
‘콜만스코프 유령 마을’

테임 임팔라 “The Slow Rush”

폐허 - 나미비아 ‘콜만스코프 유령 마을’
이미지 출처: travelawaits.com

버려진 집안에 허리 높이까지 쌓인 모래 언덕.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듯한 이 공간은 나미비아 남부 나미브 지역에 위치한 콜만스코프라는 유령 도시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콜만스코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며 광산업을 통해 번성한 마을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식민 지배 아래 지역 주민들은 광산 노동자로 착취당했죠. 1930년대에 인근에 더 큰 광산이 발견되며 마을은 서서히 쇠락했고, 이후 완전한 유령 도시가 되었습니다.

테임 임팔라 “The Slow Rush”
이미지출처: pitchfork

사막에 위치한 콜만스코프의 폐허는 우리가 도시에서 봐온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실내를 가득 메운 모래 언덕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죠. 인간과 자연의 영역을 구분 짓던 벽을 넘어, 집안으로 밀려 들어온 바깥의 풍경은 인간 존재를 집어삼키는 자연과 시간의 거대함을 상기시켜요. 끝없이 펼쳐진 시공간 위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든 휩쓸려 갈 수 있는 작은 존재라는 것을요.

콜만스코프의 풍경에 매료된 테임 임팔라의 케빈 파커(Kevin Parker) ‘더 슬로우 러쉬’의 커버 제작을 위해 사진작가 내일 크룩(Neil Krug)과 함께 나미비아에 방문합니다. 집안을 가득 메운 모래 언덕과 붉은 벽, 파란 하늘의 대비로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커버 디자인을 완성하죠. 테임 임팔라만의 몽환적이고 사이키델릭한 사운드가 앨범 커버를 통해 눈으로 읽히는 듯해요.


빛바랜 벽과 기둥, 풀과 모래에 뒤덮인 집, 녹슬고 부식된 건물의 뼈대가 모여 ‘시간’이 됩니다. 우리는 폐허 안에서 긴긴 세월을 읽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 작품도 자연이 만들어 낸 흔적만큼 시간을 온전히 표현할 순 없겠죠. 많은 예술작품이 폐허를 배경으로, 소재로 활용하는 건 그 시간의 겹을 자신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영화나 사진을 보다가 문득, 배경의 낡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면 천천히 공간을 읽어보세요. 공간 속에 스민 시간만큼이나 더 넓고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Picture of 김동이

김동이

그리거나 찍거나 쓰거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에디터의 아티클 더 보기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과 협업하고 싶다면

지금 ANTIEGG 제휴소개서를 확인해 보세요!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