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묶을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요? 피를 나눴거나, 동거하고 있거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사이일 수도 있죠. 예로부터 호적이나 족보에 이름을 함께 새길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었다면 이제 가족이란 개념은 저마다 다른 모양일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속된 관계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영화 속 다양한 형태의 가족 이야기에 나의 가족을 대입해 보세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좋은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디서 비롯되었든 접하고 있는 존재
<애프터양>
한국계 미국인 영화감독 코고나다의 <애프터양>은 AI 로봇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SF 장르로 구분되지만,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애프터양에 등장하는 4인 가족은 구성부터 독특합니다. 다양한 인종에 로봇까지 소속되어 있죠. 특히 ‘양’이라는 로봇은 입양한 중국계 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데려온 존재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구성의 가족들이 참가한 댄스 경연 대회에서 호흡을 맞추고, 가족사진을 찍는 가족 구성원이지만 또렷한 목적이 있는 관계입니다.
영화 초반부에 양은 과부하로 인해 고장 납니다. 주인공 제이크는 양의 기억 장치를 통해 로봇의 삶을 들여다보죠. 양을 수리하기 위해 제이크는 한 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은 제이크의 가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가족 구성원이었던 양이 멈춰 있는 시간 동안 제이크는 양의 시선을 빌려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양의 기억 중에는 양이 딸 미카에게 두 나무를 접붙이는 ‘접목’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온 가지가 나무의 일부가 되어 가고 결국 연결되는 것이라 말하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애프터양>의 시선을 빌려 각자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성과 가족, 그리고 갈등과 성장
<우리의 20세기>
1979년 미국 산타바바라, 싱글맘 도로시아와 아들 제이미로 단출하게 구성된 가족은 셰어하우스를 운영합니다. 어느 날 도로시아는 셰어하우스에 사는 두 여성 애비와 줄리에게 제이미를 함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요. 사춘기에 접어들며 도로시아와 부딪히고, 울타리 바깥세상에서 구르고 넘어지는 제이미 때문이죠. 물론 제이미는 멍 자국을 대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아이를 키우기 위해 꼭 남성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도로시아의 말처럼 셰어하우스 지붕 아래서 갈등과 성장을 거듭하는 제이미와 여성들의 서사가 쌓여나갑니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은 음악과 몸짓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50대 도로시아는 30~40년대 클래식을 듣고 애비와 제이미는 데이비드 보위, 토킹 헤즈와 같은 펑크를 듣지만, 어떤 음악이 나오든 몸을 흔들 수 있는 관계입니다. 어머니에게 여성의 삶에 관한 작가 ‘조 모스’의 문장을 읽어주는 아들 제이미와 라이브클럽에서 펑크 록을 듣는 도로시아에게서 서로의 세계에 발을 담가볼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에게 묻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감독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우리의 20세기>은 자신을 키워준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습니다.
기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어느 가족>
피를 나누지 않아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들은 무엇을 나누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마트에서 좀도둑질을 하거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등의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아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죠. 그러던 어느 날 가정 폭력을 당하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오면서 이 가족은 또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여섯 번째 가족 구성원이 된 아이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오빠에게 도둑질을 배웁니다. 이곳에서는 제 몫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주고 일말의 기대를 품는 가족의 형태와는 사뭇 다릅니다. 각자 본래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며 유대감을 쌓아가는 ‘어느 가족’은 마치 유치가 빠져 지붕 위로 던지는 과정처럼 성장합니다. 경계 없는 바다에 몸을 던지며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이들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이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비로소 느껴지는 관계
<애프터썬>
영화 <애프터썬>의 주인공 소피는 오래된 캠코더를 꺼내보며 아버지와의 여행을 회상합니다. 20여 년 전, 이혼한 아버지 캘럼과 딸 소피는 찬란한 여름날의 튀르키예 바닷가에서 만나 휴가를 보내는데요. 캘럼은 오롯이 소피와 함께할 수 있는 여행에 최선을 다하려 자신의 아픔과 방황을 숨깁니다. 소피는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캠코더에 담긴 그의 방황을 알아챌 수 있었죠. 한창 성장하는 사춘기 딸과 노을처럼 어둠 속으로 지고 있는 아버지의 감정선은 영화 곳곳에서 대비되어 연출됩니다.
영화는 열한 살의 소피가 미쳐 보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과 본인의 나이였던 아버지가 겪었을 감정을 유추하는 소피의 상상이 뒤섞여 있죠. 동성 연인과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소피는 어느덧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20여 년 전 아버지의 시선으로 녹화된 테이프는 멈췄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소피. 그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본인이 선택한 가족과 새로운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뒤늦게 깨닫고 느껴지는 것들이 가족 사이에는 존재하나 봅니다.
지인들과의 약속으로 분주해지는 연말입니다. 추운 날씨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번지는 온기를 찾는가 봅니다. 캘린더는 점점 채워지지만 오히려 가족에게는 자칫 소홀할 수 있는 시기가 연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형태나 구성원은 다르더라도 가족에게 애정하는 마음을 표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연말에는 쓸 수 있는 인사말도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