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한 영화 <바비>는 고착화된 성역할을 빛나는 상상력으로 담론화한 의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여성이 주류세력으로 활약하는 가상 세계 ‘바비월드’를 구현해 성 고정관념이 파괴된 세상을 다채롭게 그려냈죠. 여성이 권력을 독점하고 남성이 빈약한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이질감과 동시에 기시감을 자아냈습니다.
여자가 파란색 옷을 입고 남자가 분홍색 옷을 입었을 뿐인데 천지개벽처럼 모든 것이 혼돈에 휩싸인 세상, <바비>처럼 영리하고 유쾌한 유머로 성역할의 고정화를 재고하게 하는 성별 반전 영화 세 편을 소개합니다.
이 분야의 스테디셀러
<거꾸로 가는 남자>
프랑스 | 장편 | 2018 | 넷플릭스
“그에게 여자란 꽃이거나 사냥감.” 평생을 남성우월주의자로서의 혜택을 누리며 버릇처럼 여성을 희롱하던 남성 ‘다미앵’이 별안간 거꾸로 뒤집어진 세상에서 눈을 뜹니다. 이곳에선 여자가 웃통을 깐 채 조깅을 하고 모든 권력과 부를 쥐고 있으며, 남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조신한 내조남’이나 ‘화끈한 창부’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미앵이 ‘원래’ 세계의 정상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설파하지만 그저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죠.
<거꾸로 가는 남자>가 보여주는 중요한 핵심은 남성의 성적 수치심입니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짧은 반바지를 입고 걸으면 무작위한 음담패설이 쏟아지고, 제모하지 않은 몸이 더럽다며 거부 당하거나,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 못한 채 자신의 욕구를 무시 당합니다. 성적 주도권을 휘두르던 행위자가 삽시간에 평가받을 대상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통해 그간 일방적으로 대상화되던 여성의 무력감과 분노를 가시화합니다.
스웨덴식 하이틴 무비
<걸즈 앤 보이즈>
스웨덴 | 단편 | 2015 | 비메오
하이틴 드라마의 성별이 역전됐습니다. 사춘기 소녀의 몽정 장면으로 시작한 이 영화에선 남학생이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와 힐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여학생은 짧은 머리에 대충 티셔츠를 걸친 채 그들을 애인으로 독차지하려 고군분투하죠. 여성청소년이 ‘동정을 뗐는지’의 여부가 무리 내 인정받는 조건이기에 주인공은 절친의 남동생과 잤다며 가짜허세를 부리기까지 합니다.
<걸즈 앤 보이즈>는 숫기 없는 주인공이 사랑을 위해 일진 우두머리와 대치하는 내용입니다. 퀸카를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싸움. 결국 솔직하고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저 성별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영화는 현상을 낯설게 보게 해줍니다. 명예를 위해 성경험을 과시하고 상대를 난잡하다 폄하하는 여학생들, 성적 위험에 노출되고 제 몸을 지킬 힘이 없는 남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청소년의 성적 위계 문제점을 짚어냅니다.
남성 임신 기술이 성공했습니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대한민국 | 단편 | 2023
“저출산을 해결하려면, 그냥 가임 인구 숫자를 늘리면 되는 거잖아요?” 남성 임신 기술이 개발됐습니다. 시험관 아기 시술로 지쳐있던 아내 ‘유진’ 대신 남편 ‘정환’이 임산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진을 위한다며 큰 소리쳤지만 정작 정환은 두려움에 떨며 언제라도 무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임신했던 산부 선배들을 보니 경력 단절에, 늘어난 가슴에, 성적 매력까지 감퇴됐다는 무시무시한 후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올해 유수의 영화제들을 휩쓴 화제작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은 기발하고 통쾌한 상상력으로 사회문제를 풀어냅니다. 단순히 ‘낳으라’고만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역할을 분담시킴으로서 아이를 배고 출산하는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공감시키죠. 개성있는 작화와 허를 찌르는 대사, 이용녀 배우의 실감나는 더빙까지 더해진 우수한 블랙코미디입니다.
‘motherfker’ 대신 ‘fatherfker’가 욕으로 쓰이는, 누군가에겐 비정상이지만 어떤 이에겐 유토피아처럼 온전할 세상. 영화적 상상력으로 구현된 성반전 세계관은 거울기법을 통해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여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게 해줍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익숙한 나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것이 뒤집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