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작품 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를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측에서 AI 기술로 원본을 대체한 결과물을 전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된 부분은 ‘원본 이미지를 학습해 생산한 AI 이미지가 예술 표절에 해당하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AI에 특정 기술을 학습시킨 다음, 비슷한 구도나 형식,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표절이라고 보아야 할지 혹은 창작이라고 봐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기존의 이미지를 조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자체는 인공지능, 과학기술에 해당한다. 인간의 창조물인 인공물이 제작한 이미지에 대해서 과연 창작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는지, 감상할 수 있는 영역인지에 대해 우리의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필자는 현재 예술의 상황과 창작에 대해 되돌아보며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미 포스트 휴먼적인 예술
사실 창작의 영역, 현대 예술에서 기본적으로 재료, 도구, 기술과 같은 방법보다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개념이 더욱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로 인해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 하지만, 과거 고려되지 않았던 요소를 예술이 포괄하는 것은 사실이다. 언어, 조형물, 비디오 등 각각 독립된 원리에 따라 서로 배타적인 영역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예술의 질료로 사용된다. 생필품, 일상적 사물, 일상적인 사진, 복제물들이 배척되지 않고 화이트큐브에 편입되었다.
과거의 경우 개념보다는 ‘어디에’ 구현할지 그 대상이 중시해야 하는 요소였다. 예를 들자면 캔버스에 구현하면 회화이며, 돌에 구현하면 그것은 조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개념과 대상의 관계가 전복되었다. 표현할 개념이 있다면, 의도, 창작력, 생각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붓을 사용하느냐 매체 요소를 사용하는지는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의 작품 “Fountain(1917)”이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는 ‘망막예술(Retinal Art)’ 패러다임을 뒤집고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현대 미술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미 인공지능을 작품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노진아 작가의 “진화하는 신, 가이아(An Evolving GAIA), 2017”가 선례가 될 것이다. 보통 작품은 한 시대의 의미 있는 순간을 박제한 것으로 취급하곤 한다. 하지만 이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쉴 새 없이 데이터를 쌓으며 미완성에서 완성이라는 점근선을 향해 인간과는 상대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을 통해 성장한다. 초기 단계에는 조악한 수준의 답변을 내어놓기도 했지만, 현재는 인간이 예상하지 못하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이 작품을 통해 결론은 사람이 개입하여 AI를 작품의 한 요소로 사용한다면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NFT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실존 세계에 존재하는 예술을 메타버스로 옮겨 오리지널화하겠다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점은 이제는 실존 세계에 존재하는 작품을 옮기는 개념이 아닌, 새로운 디지털 세상 안에 예술을 창작하는 창작자의 개념인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즉 AI와 인간이 예술 창작자라는 위치를 두고 경쟁하는 현시점의 상황이다.
AI도 창의성을 가지느냐
AI도 창의성을 가지느냐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창의성의 정의를 고려해야 한다. 창의성(創意性, creativity)은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있던 생각이나 개념들을 조합하여 새로이 생각해 내는 특성이다. 창조성(創造性)이라고도 하며 이에 관한 능력을 창의력(創意力), 창조력(創造力)이라고 명시하기도 한다. 창조력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 힘입어 발휘되고, 창의력은 ‘이을 수 없는 점을 잇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정의처럼 현재에 완벽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다. 현재 시점에서 창의성은 배열 능력, 즉 맥락 속에서 새롭게 배치하는 능력을 지칭한다**.** 즉, AI는 새로운 배치가 가능하냐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AI의 경우, 인간의 뉴런 작동 방식을 베낀 모델이며 GPU(그래픽 프로세싱 유닛) 칩을 통해 대규모 병렬 계산을 하며 딥러닝의 과정을 밟는다. 수치로 따지자면 1초에 312조번 연산할 수 있다. 이러한 학습의 규모가 커질수록 AI의 성능에서 양에서 질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이것을 ‘Emergent Ability’ 다시 말해 AI 시스템에 갑자기 인간이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나는 기술이 생긴다는 것이다. 추론 능력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든지, 코딩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거나,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잠재된 패턴을 발견하며 배열하는, 위에서 명시했던 창의력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만 의도에 의한 창의력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결과적인 창의성’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민주화로 향하는 문화예술
인공지능이 결과론적인 창의력을 지닌다는 점은 창작이 가능하다고 들리기도 한다. 이는 창작이라는 영역을 인간이 빼앗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틀어 보자면 예술이 민주화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기를 쥐고 있다면 누구든지 사진가가 될 수 있다는 점과 같다. 다만, 어떠한 기준에 의해 작품의 훌륭함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 기준은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 보다는 그것이 어떤 예술인지, 무엇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일 것이다.
“만약 컴퓨터가 인간을 속여 자신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 할 수 있다면 컴퓨터를 인텔리전트(intelligent)하다고 부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_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의 말을 빌려 필자가 첨언하자면,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작품이 마치 인간이 만든 것과 같이 느껴지며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인간이 만든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인정해 줄 수 있으며 우리가 향유하기도 하며 이에 대해 평가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 인공지능의 윤리 8항목 중 책임성 영역에서 “결과물이 인공지능이 제작한 것이 아닌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개발한 개발자와 그것을 사용한 사람이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게 책임성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인공지능의 창작 권리와 그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는 저작권으로 AI의 산출물을 보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기반하여 가정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예술의 영역 안에 존재하지 못한 요소였지만, 현재는 자명하게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저작권의 개념, 예술의 개념도 충분히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할 수 있기에 이 논제에 대한 답변을 성급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인류는, 예술가는 항상 유연하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왔다. 마찬가지로 예술과 기술은 낯설지만 공존할 것이다. 획일화에 가두는 것이 아닌 다양성과 개방성을 기반으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면 말이다.
한편으로 필자는 예술의 창작 또한 중요하다고 믿지만, 앞으로 민주화되는 예술에 있어서는 창작의 영향력 보다는 인간의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술적인 감각으로 지금보다 훨씬 각광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 또한 현재의 처지에 기반한 미래에 대한 오만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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