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노동자에게
강냉이를 준다면

랩삐의 '강냉이 털어 국현감'이
관람자에게 되돌려주는 노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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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떠돌다 보면 ‘혐생’이라는 단어를 종종 마주친다. 이는 ‘혐오스러운 인생’의 줄임말로, 직장인에게는 많은 경우 ‘일에 매여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학생의 경우 아마도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닐까?). “일하고 왔어”가 “혐생 살다 왔어”라는 말로 대체되는 경우를 볼 때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시에 어쩌다 일이 혐오스럽기만 한 것이 되었는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물론 우리가 일을 혐오하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아마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연료 삼아 매분 매초 스스로를 소진해 나가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이에서 벗어나 여가를 누리는 것이 행복한 삶을 증명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우리가 일을 혐오하게 된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항공앱의 리워드. 이미지 출처: Trend Hunter

그런데 자세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혐생이라고 부르는 노동시간, 즉 근무시간만이 우리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발달한 기술과 더욱 첨예해진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이제 24시간 일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 삶에서 노동과 여가시간은 그리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비단 퇴근 후에도 지겹게 울리는 사내 단톡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 자체가 환금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여가시간에도 끊임없이 노동한다. 우리는 스마트폰 앱이 우리의 걸음 수를 추적하는 것에 동의함으로 커피 쿠폰을 벌기도 하고, 할인 쿠폰을 받기 위해 매일 한 번씩 기회가 주어지는 온라인 룰렛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뿐이겠는가? 게임 속 내 캐릭터에게 조금 더 좋은 무기를 쥐여주기 위해 게임 앱을 열 때마다 30초 광고를 재생하기도 한다. 순환하는 데이터 경제 속에서 우리는 놀며 여가를 보내고 있다고 믿는 시간에도 누군가를 위해 ‘즐겁게’ 노동하고 있다.


놀이노동: 숨겨진 노동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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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시간 역시 자본이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자유시간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근대화는 우리의 삶에서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양분했고, 우리는 노동의 예속에서 벗어날 시간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보드리야르는 완전한 의미의 여가, 자유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이러한 상황에서 “화폐와 시간의 배설물이 된 것도 오히려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하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객체가 되고 교환가치로 조작되는 것은 우리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상황은 이제 조금 더 나빠졌다. 우리가 노동을 통해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낸 자유시간, 소비하기 위해 얻어낸 그 시간에 마저 우리는 다시 노동 속으로 되돌려 보내지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루트를 통해서. 데이터 기반 경제는 교묘하게 노동을 여가 속으로 잠입시킨다. 게임, 룰렛, 출석체크, 짧은 광고시청 등 수많은 디지털 유희가 노동의 알선소로 변해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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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가 줄리안 퀴클리히는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이 자신도 모르게 게임과 상호작용하며 하는 노동을 놀이노동(playbor)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많은 게임 이론가들이 퀴클리히의 놀이노동 개념을 확장해 게임 속에서 ‘골드’ 등의 형태로 환금되는 플레이어의 노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게임 이론가들을 놀이노동을 게임의 사례에 한정해 설명했지만, 이는 우리의 여가에 조용히 침투한 노동에 모두 적용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놀이와 노동을 뒤섞어 그 행위가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놀이노동의 모호함은 놀이노동을 제공하는 쪽이 놀이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을 착취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놀이노동은 놀이의 형태로 노동을 제공하게 하기 때문에, 노동하는 이가 이를 노동이라고 쉽게 인식하지 못 한다(혹은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할 수 없게 만들며, 놀이노동으로 얻은 이득은 모두 대가 없이 받은 것이라고 인지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미술관 안에서도 벌어진다.


미술가의 아웃소싱: 관람자의 노동

마우리치오 카텔란, Southern Supplies FC ,1991, 컬러사진에 콜라주, 77 x 100 cm, Courtesy Marian Goodman Gallery, © Maurizio Cattelan>

미술사학자 클레어 비숍은 자신의 저술 『위임된 퍼포먼스: 진정성의 아웃소싱(Delegated Performance: Outsourcing Authenticity)』에서 동시대 행위미술가들이 퍼포먼스 자체를 일반인들, 특히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웃소싱’하는 현상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비숍의 통찰은 우리에게 예술작품을 만들어나가는 노동이 불평등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미술가를 떠나 타자에게 위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동시대 미술이 ‘관람자’에게 노동을 위임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해보려 한다. 관객 참여형 전시가 끊임없이 열리는 지금, 관람자들은 여가를 보내기 위해 온 미술관에서도 노동을 한다. 이러한 전시와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관람자가 작품에 직접 참여하기 전에는 잠재적인 형태로만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 잠재태가 비로소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관객이 직접 작품을 완성하는 일종의 노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람자가 작품을 완성시켰을지라도 그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찌 보면 고용된 일반인 퍼포먼서보다 미술 경제의 위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또 가려지는 대상은 바로 관람자일지 모른다. 왜냐면 그들의 노동은 너무나도 모호한 여가노동, 놀이노동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Lab B)의
<강냉이 털어 국현감>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포스터.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강민정, 안가영, 최혜련, 제닌기 4명의 작가가 모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Lab B)는 미술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놀이노동을 <강냉이 털어 국현감>이라는 제목부터 유쾌한 작업을 통해 가시화한다. 랩삐는 전시를 위해 직접 옥수수 밭을 반년 간 직접 일군다. 처음 농사를 지어본 초보농사꾼들의 분투가 <전시는 모르겠고 강냉이 털기에도 바쁩니다>라는 영상 작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랩삐, <전시는 모르겠고 강냉이 털기에도 바쁩니다>,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7분.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관람자는 전시장 내에서 ‘원 클릭 쓰리 강냉이’라는 게임을 하게 되는데, 이 게임은 모바일 농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랩삐는 ‘원 클릭 쓰리 강냉이’를 통해 자신들이 경험한 농사를 관람자가 디지털 공간에서 대리체험하게 만든다. 작품을 통해 실제 노동이 ‘클릭하는’ 디지털 노동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장을 직접 방문했을 당시 많은 관람자들이 스마트폰에 몰두한 채 열심히 가상의 밭을 클릭해 돌을 치우고 물을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나 역시 그 중의 한명이었다. 특히 콘코인을 획득하기 위한 ‘원 클릭 쓰리 강냉이’의 마지막 라운드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콘코인을 향한 마지막 여정은 바로 옥수수수염과 안경을 씌워주는 게임 내 카메라를 이용해 셀피를 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즉시 전시장 내 모니터에 공개된다! 콘코인을 위해 셀피를(비록 옥수수수염과 안경으로 가려진 얼굴이 단지 몇 분만 모니터에 나타날 뿐이지만) 전시에 제공하는 경험은 즉각적으로 개인의 이미지와 정보를 제공하면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데이터 기반 경제를 환기시켰다. 실제로 랩삐는 한 금융어플이 놀이노동을 통해서 보상을 제공하고, 이에 몰려드는 유저들을 본 경험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전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원 클릭 쓰리 강냉이 게임 시작 화면

랩삐가 탐구하는 노동과 교환의 문제는 “파밍파밍 아케이드”에서 더욱 심화된다. 관람자는 “파밍파밍 아케이드”라는 인터렉티브 설치 작업에 앉아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 “파밍파밍 아케이드”는 방석에 앉아있는 관람자의 수에 따라 중앙 기둥의 불빛이 바뀐다. 관람자는 “파밍파밍 아케이드”에 앉아 ‘원 클릭 쓰리 강냉이’ 게임을 함으로 전시가 요구하는 디지털 노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설치 작업의 일부가 되어 랩삐의 작업을 완성시킨다. 관람자는 “파밍파밍 아케이드”에서 즐겁게 이중의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랩삐의 작업이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관람자가 전시장 내에서 수행한 노동을 콘코인으로 환산해 직접 농사 지어 수확한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로 교환해준다는 점이다. 랩삐의 작업에서 관람자는 더 이상 작품의 무급노동자가 아니다. 관람자는 작품을 활성화하는 디지털 노동을 제공하고 랩삐는 자신들의 노동의 산물인 강냉이를 지불한다. <강냉이 털어 국현 감>은 데이터 기반 경제의 놀이노동을 지적할 뿐 아니라, 관객 참여형 전시의 가장 은폐된 노동자, 관람자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이를 ‘강냉이’로 교환한다. 나는 강냉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강냉이를 꼭꼭 씹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간 제대로 대가를 받은 적이 없던 놀이노동이 내 일용할 양식이 되는 순간이었다.

콘코인과 교환한 강냉이

놀이노동의 다른 측면

랩삐가 <강냉이 털어 국현감>에서 건네준 강냉이는 놀이노동의 다른 측면 역시 환기한다. 우리가 귀중한 여가 시간에 놀이노동에 참여하는 이유가 단순히 거대자본과 기관의 책략을 눈치채지 못 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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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 슈타이얼이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금융화는 현재의 경제적 생활력을 “부채에 의해, 말하자면 현재에 청구되거나 소비되거나 지출되는 미래의 수입에 의해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 금융화는 우리 노동의 보상을 저 멀리 탈구시켜 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우리를 만성적인 빚쟁이 상태로 밀어 넣었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대가를 즉각적으로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월급날을 생각해 보자. 월급날은 언제인가? 급여를 주는 이의 편의, 돈을 정체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이자, 그리고 받은 월급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획하는 것(다음 월급날까지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전략)의 편의를 위해 월급은 매달 같은 날에 지급된다. 우리가 오늘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 야근까지 불사하며 노동한 사실은 우리의 기억과 전산 기록에만 남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터를 떠날 때 응당한 보상은 전혀 주어지지 않으며 저 멀리 특정한 날짜로 지연된다. 나 역시도 노동의 대가를 즉각적으로 받아본 일은 거의 없다. 이렇게 지연되는 대가는 우리를 노동에 헐떡이는 채로 남겨둔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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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두 번, 예기치 못한 대가를 손에 쥐어본 적이 있다. 나는 대학 시절 그다지 많은 급여를 받지 못하는 레스토랑 서버로 일한 적이 있다. 월급날은 멀었고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을 전부 근무하며 보내는 것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손님이 “올 때마다 항상 바쁘시네요.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메뉴 추천을 잘 해주세요. 고마워요.”라고 이야기하며 작은 초콜릿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렇게 노동의 대가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주어지기도 한다. 그 즉각적인 대가는 월급날 주어지는 월급보다는 훨씬 적고, 금전적인 보상이 아닌 감정적인 만족에 머물지라도 우리에게 큰 효과를 발휘한다. 랩삐가 <강냉이 털어 국현감>에서 관람자에게 건네준 강냉이는 마치 그 초콜릿과 같아서 노동이 사실은 즉각적으로 보상받을 수도 있는 행위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는 꽤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며 노동을 보람찬 것으로 만든다. 놀이노동에는 분명 착취적인 성질이 있지만, 우리라고 놀이노동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놀이노동이 대개 제공하는 즉각적인 보상은 노동이 원래 보상을 위한 행위라는 것을 재확인하게하며, 노동이 즐거울 수 있고 정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어쩌면 놀이노동은 노동과 여가를 양분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놀이노동이 자본에 의한 착취 수준에 이르지 않는 선에서 머물 수 있다면 말이다. 현실적으로 비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나 미술은 우리에게 대안과 희망을 제시한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변화를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일’은 나를 부양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자아실현의 수단이고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다. 노동의 가치가 점점 폄훼되고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하는 일이 만연해지면서 우리가 일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게 안타깝다. 특히 현재 미술계의 노동 현실을 볼 때 더더욱 그렇다. 히토 슈타이얼이 『면세 미술』에서 지적하듯, 미술계는 특히 무급노동과 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스타 시스템에 안전하게 편승한 미술가와 그렇지 못한 미술가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르고, 갤러리 인턴, 비정규직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의 사정도 그리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랩삐와 같은 동시대 미술 콜렉티브들이 미술과 노동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많이 내놓고 있는 지금, 미술계 역시 이러한 작업들을 단순히 소개하고 전시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미술과 노동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유진

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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