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슬픔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그 중 가장 마음 아프지만 피할 수 없는 상실은 생사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이별의 결말이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상실의 슬픔을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담담하게 애도하며 상실을 직면합니다.
그가 애도하는 방식은 보통의 사별을 기리는 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연인을 잃은 상실을 투영한 간결하다 못해 단순해 보이는 작품은 단절의 절망만을 담아내지 않습니다. 비정형적으로 삶 속에 존재하는 유한함을 무한히 기념합니다. 이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는 바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입니다.
철저한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삶
작품을 논하기 앞서 그의 생애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95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요동치는 쿠바에서 태어나, 1971년 스페인의 고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후 푸에토리코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며 예술계에 진입하고, 1979년 뉴욕으로 이주해 자신만의 예술 이론을 정립시켜 나갑니다. 이때 고아원 출신, 이민자, 유색인종, 동성애자인 ‘사회적 소수자의 소수자’로 취급받던 자신을 오롯이 이해해주는 연인 로스 레이콕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사랑을 만끽할 새 없이 연인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으며, 이후 자신 또한 에이즈로 생을 마감합니다.
작가가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는 에이즈가 세계적 공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의 차별과 편견이 극심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그는 주류 사회의 변방 즉, 주변인이자 소수자였기에 공식적으로 성소수자임을 전면에 밝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조각과 같은 정형의 형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목을 무제로 두며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면서도, 그의 경험과 감정이 담아냈죠. 소수자로서의 삶, 연인의 죽음, 흐르는 사랑과 그리움과 같은 삶의 나약함을 담는 부제를 붙이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동시에 작품 안에서 존재하는 단출한 오브제들인 시계, 거울, 인쇄물, 사탕, 전구, 비즈 커튼, 스냅사진, 빌보드는 극도의 절제미 속에서도 관객과 작품의 소통속에서 자유로이 변형 가능한 형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작품에 숨을 불어 넣는 관객과
부활하는 사랑들
그의 대표작은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배치된 “무제(완벽한 연인들)”입니다. 두 개의 시계는 작가와 그의 옛 연인을 상징합니다. 처음에 두 시계는 시, 분, 초를 완벽히 공유하지만 미세한 오차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시, 분, 초가 서서히 어긋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배터리의 수명이 다해 시계 한 쪽은 멈추며 이는 상대의 부재를 관찰자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듭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랑했던 둘이었지만 둘 사이의 시간과 사랑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내포합니다. 이후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던 시계마저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직원은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끼웁니다. 다시 두 개의 시계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다가 이내 다르게 흐르게 됩니다.
다른 작품인 “무제(LA에서 로스의 초상)”과 “무제(Lover Boys)”는 각각 미술관에 쌓여 있는 175파운드, 355파운드의 사탕이며 관람객들이 사탕을 집어가도록 요청한 작업입니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소진된 사탕의 무게만큼 다시 채워 그 무게를 유지합니다. 사탕의 무게인 175파운드는 그의 연인 로스가 건강할 때의 몸무게를, 355파운드는 그와 그의 연인을 상징합니다. 사탕 더미가 소진되는 과정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로스의 육체와 추억의 상실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관객들은 사탕을 입에 넣으며 순간의 사랑과도 같은 달콤함을 느끼고 이내 달콤함 끝에서 작가와 그의 연인의 죽음을 떠올리며 애도하기도 합니다. 혹은 그 중 몇몇은 각자의 개인이 잃어버렸던 존재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사탕은 자신의 옛 추억과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이며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실, 공허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브제를 관객이 가져가지 않지만, 개인의 상상력으로 완성되는 작품도 존재합니다. 뉴욕 시내 곳곳의 빌보드에 전시된 헝클어진 침대 사진은 그 어떠한 설명도 주지 않습니다. 사진 속에는 텅 빈 하얀 침대 위 누군가 방금까지 사용했던 흔적이 있는 두 배게와 작품의 부제만이 남아있습니다. 비틀어 보자면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여백이 남아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방금까지 온기를 머금은 흔적은 작가의 생애를 접했다면 연인 로스의 부재와 토레스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혹은 공허하고 텅 비어버린 침대를 마주하며 제각각 상실의 기억을 찾아내고 숨어있는 슬픔과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저 사랑의 부재만을
품는 작품인가?
물론 그의 작품 제목이 무제이기에 의미는 추정하기 나름입니다. 공통적으로 개인이 작품을 만지거나 소유하면서 단지 작품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는 관조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죠. 작품에 직접 개입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각각 새로운 관계를 맺기에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각각의 해석은 작품의 일부가 되며, 비로소 작가의 작품은 온전히 완성됩니다. 작가의 서사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기억 속에 잊어버렸다고 믿은 시절을 추억하며 다시금 한 번 회상하게 되기도 합니다.
혹은 시계의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사탕의 무게가 다시 채워지는 순환구조를 통해 사랑의 부재가 아닌 영원히 살아 숨쉬는 사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 자체가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이기에 시계나 사탕을 보는 행위가 그들의 사랑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소수자였던 작가의 투쟁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Untitled(billboard of an empty bed)”가 만들어지기 이전 1986년 정부가 동성애자들의 행동을 점검하기 위해 그들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시대적 배경을 참고한다면 해석의 여지는 다양합니다. 공공의 장소에 자신의 침대 사진을 걸어두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장소가 박탈당함을 소리없이 호소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연인의 부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를 투영하기도 합니다. 연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동시에 사회적 차별과 소수자의 자유의 묵살에 대한 아우성이기도 할 것입니다.
전구로 구성된 작품인 “Untitled – ‘North’, detailed” 또한 다양한 해석으로 완성됩니다. 연인을 만난 이후에 오래 캐나다에 거주해 있던 사실을 접했더라면 그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제인 북녘의 의미가 작가의 출생지인 쿠바에서 북녘의 땅인 미국으로 일컫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자본주의와 자유의 꿈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가능합니다.
“정적인 형태의 단단한 조각을 거부하고, 소멸하고 변화하며 불안정하고 연약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하루하루 로스가 사라져 가는 공포를 연습하기 위한 내 노력이다.”
_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상실을 미리 경험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사랑했던 한 시절, 혹은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들을 잃는다는 공포로부터 탄생했으며 자신 스스로의 공포를 조절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작품을 만든 순간 자신이 먼저 일부를 섭취하며 파괴했기에 관객에 의해 작품이 점점사라지는 것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삶에서 자신을 떠나고 사라졌던 존재들과 동일함을 밝혔습니다.
WEBSITE :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INSTAGRAM : @felixgonzaleztorres.foundation
“1988년, 나의 연인에게. 시계를 두려워하지 마. 그건 우리의 시간이고, 언제나 시간은 우리에게 너그러웠어. 우리는 승리의 달콤한 맛을 시간에 아로새겼지. 우리는 특정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에 만나 운명을 정복했어. 우리는 그 시간의 산물이기에, 때가 되면 마땅히 갚아야 해. 우리는 시간을 함께하도록 맞춰졌어, 지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
_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토레스가 에이즈 판정을 받은 그의 연인 로스에게 쓴 편지
토레스는 상실을 투영한 기념비 같은 작품으로 연인을 추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품을 마음껏 가져가고 만지도록 유도합니다. 그의 연인 로스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달콤함, 혹은 개인이 겪은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만약 상실의 슬픔에 잠긴 내면만을 표현했다면 로스의 삶은 닿을 수 없는 벽 너머로 종결되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로스에게 전해준 편지의 글귀처럼 그가 로스를 관객과 소통하는 오브제로 담아낸 것은 연인의 시간이 계속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