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담배-담배와 영화-영화와 시-시와 산책-산책과 연애-연애와 술-술과 농담-농담과 그림자-그림자와 새벽-새벽과 음악.’ 친숙한 두 낱말의 조합으로 낯선 끝말잇기가 완성됩니다. 이들은 출판사 시간의 흐름에서 4년간 선보인 ‘말들의 흐름’ 에세이 연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저자가 두 개의 낱말을 제시하면 다음 저자는 앞사람의 두 번째 낱말을 이어받은 뒤, 새로운 낱말을 제시하며 이어가는 방식의 시리즈인데요. 하나의 낱말에 대해 사람과 사람은 각자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까요? 열 차례의 끝말잇기 속에서 무심결에 탄생한 네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정은, 『커피와 담배』
“나의 담배는 그렇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담배가 있겠지. 담배에 불을 붙일 때면 함께 불려 나오는 기억들. 방처럼 펼쳐지는 기억들.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집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많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집. 그렇지만 무게가 전혀 나가지 않는 집. 담배에 불을 붙이면 그것들은 안정감 같은 특수한 감정의 형태로 몸에 잠시 내려앉는다. 그것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을,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_『커피와 담배』 67p
“삶이 괴로운가요? 커피를 한 번 내려보세요. 사는 게 외로운가요? 담배를 한 번 태워보세요”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소설가 정은의 『커피와 담배』로 시작됩니다. 커피와 담배는 그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호품입니다. 애호가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들과 함께 순간을 누리고자 하죠. 저자는 9년 차 바리스타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커피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뻔한 삶을 구원해 준, 세상과 자신의 매개체이지요. 담배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는 향이 무척이나 짙습니다.
한정원, 『시와 산책』
“세상의 조도가 낮아지고, 지붕과 나무와 빈 그네에 침침한 그림자가 진다. 선명함을 잃을 때 모든 존재는 쓸쓸함을 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
_『시와 산책』 121p
걸으며 시를 읊는 삶은 얼마나 낭만적인가요. 작가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4만 부 이상 팔린 ‘말들의 흐름’ 시리즈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산책 중독자’라고 말하는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맑습니다.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듯한 표현들과 함께 그가 걷는 길과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마저 정화되는 것만 같죠. 제목처럼 작가가 아껴온 시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기쁨입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스물일곱 개의 짧은 산문은, 곁에 두고 언제든 펼쳐보아도 좋을 거예요.
이장욱, 이주란, 김나영,
한유주, 조해진, 『술과 농담』
“술을 마시고 우리는 구겨진 마음을 괜히 펼쳐보고 안타깝게 매만진다. 수없이 주고받는 말들 중에서 한순간 우리가 함께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말이 있고, 그렇게 농담은 그 말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나와 너를 통하게 했다는 이유로 값진 것이 된다. 스스로 밀어냈던 나의 한 부분을 마주하고 수많은 이유로 미뤄뒀던 관계의 회복을 마련하는 자리에 술과 농담이 있다.”
_『술과 농담』 69p
술과 농담은 결코 뗄 수 없는 존재이지요. 술이 있는 곳엔 농담이 있고, 웃음소리는 끊일 틈이 없을 테니까요. 『술과 농담』은 무려 여섯 작가의 입담을 모은 앤솔러지라 더 특별합니다. 각자 술에 젖어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술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 같죠. 만취와 숙취를 오가며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의 이야기는 더없이 친근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시리즈의 다른 책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면, 왁자지껄한 『술과 농담』이 좋은 선택지가 되어줄 거예요.
이제니, 『새벽과 음악』
“오늘의 내가 오늘의 모습일 수 있었던 것도 많은 부분 음악에 빚졌다고 생각한다. 오랜 은신처가 되어주었고 말 없는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내 속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영매로서, 네 속에 이렇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다고, 출렁이는 춤이 있다고, 터져 나오는 울음이 있다고, 음악은 내게 나도 모르는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언제나 나는 음악 속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감정적 경험을, 무한히 날아오를 것 같은 고양감을 얻기를 기대해왔고.”
_『새벽과 음악』 57p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시인 이제니의 첫 산문집 『새벽과 음악』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리듬감 있는 시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그는 산문을 쓸 때도 그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새벽과 음악』은 창작자로서 음악과 함께 고독한 새벽을 건너는 시인의 면면이 담겨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낱말을 주제로 한 만큼, 책 본문의 QR코드를 통해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고 있는데요. 어스름한 새벽, 불면의 막막함 속에서 같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두 개의 낱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열 가지로 뻗어나가며 사유를 넓혀갑니다. 한편, 일상적인 소재에서 비롯된 연결의 감상은 우리네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엇비슷한 과정과 결말일 것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살고 있진 않을까요?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공식적으론 매듭지어졌지만, 우리 안에서 『음악과 OO』으로 다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