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 몇 번 한 거 아닌가?’ 싶은 그림들이 천억 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는 예술 세계를 이해하실 수 있나요? 20세기 대표적인 미국의 추상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이야기입니다. 형용할 수 없이 마음을 이끄는 힘을 지닌 그의 색면화를 ‘마음의 풍경화’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러나 색면의 직사각형 옆에는 어떠한 설명도, 주제를 유추할 수 있는 제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배경지식과 작품해설 없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창작물과 창작자의 관계는 끝나며, 이후 감상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는 ‘그림을 보는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외부의 해석에 의해 감상자의 경험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감상자 입장에서는 불친절한 그림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대체 무엇을 봐야 할까요?
말을 멈추고 그냥 보십시오
1) 대체 무엇을 그린 거죠?
로스코의 추상화가 이전의 예술가들과 크게 구분되는 점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묘사는 물론, 은유나 상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대체 무엇을 그린 거죠?’라고 묻는다면, 모티브가 된 그 어떠한 물체도 없습니다. 사각형의 배열과 색상, 농도 등을 다양하게 적용했을 뿐, 그의 그림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전시 해설문에도 각 그림이 그려진 배경이나 모티브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거대한 주황색이 그림의 상단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단에서는 진한 파란색 직사각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색 배경 위에서 미세한 수평 경계선이 보입니다.’ 등 눈으로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색과 구도에 대해 한 번 더 짚어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실질적인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합니다. 작가는 이렇듯 더이상의 말을 멈추고 그냥 바라보길 원합니다.
2) 감상자에게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추상화의 감상은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술이 가진 근본적인 힘에 대해 반응할 열린 마음과 약간의 상상력은 남겨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신경학자 에릭 캔들(Eric kandel)은 인간이 추상미술을 볼 때 창의력과 상상력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는 뇌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모호한 추상화를 볼 때 구상화에 비해 기억, 감정 및 복잡한 시각 패턴의 처리와 관련된 더 높은 수준의 뇌 영역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형상의 부재로 인한 그림의 여백을 감상자 스스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개인적 기억과 감정을 수집하여 채워 넣는 것입니다. 이로써 로스코가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한 말이 과학적으로도 나름 타당한 말인 셈이지요.
“예술은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탐험할 수 있는 세계이다.”
_마크 로스코
색에 매료된 당신,
주제를 놓치셨군요
1)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1946년, 로스코는 모든 형상화 작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추상화 작업에 몰입합니다. 모순되게도 그는 스스로에 대해 추상화가가 아니라며 부인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색채의 단순한 유희를 초월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추상 화가가 아닙니다. 저는 색상이나 형태 또는 그 밖의 어떤 것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기본적인 인간 감정인 비극, 황홀, 죽음 등의 표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 만약 당신이 색상의 관계에만 감동한다면, 글쎄요, 당신은 주제를 놓치고 있습니다.”
_마크 로스코
그는 예술을 장식적 역할보다는 인간의 심오한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생각했습니다. 시각적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예술의 더 깊고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이런 첨언이 오히려 예술로부터 뒷걸음질을 치게 합니다. 숭고한 감정이나 대단히 특별한 영감을 느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밀려와 자유로운 감상을 방해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조언 또한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을 겁니다.
2) 그럼에도 매력적인 색의 관계
그럼에도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제일 먼저 시선을 매료시키는 것이 색채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직사각형 색면에는 분명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모호한 경계의 형태들이 어딘가 정착하지도, 증발하지도 못한 수증기처럼 캔버스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그의 사각형은 기하학적으로 불완전하며, 흰색이나 옅은 색들은 종종 배경색이 뚫고 비칠 만큼 흐릿하고 비균일적입니다. 둥둥 떠 있는 듯한 형태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몽환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하죠. 뿌옇게 내려 앉은 수증기 속에 갇히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정말로 누군가는 이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몽환적 사색을 할 수도 있겠지요.
반면, 폭발적인 반전의 에너지를 내뿜는 작품도 있습니다. “No. 14(1960)”은 짙은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위아래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합니다. 게다가 높이 2m 90, 너비 2m 66의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감마저 느껴집니다. 색이 강할수록 부딪히는 힘도 강하게 되지요. 갈등이나 충돌은 곧 파괴를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절박한 상황에 그린 것은 아닐까?’하고 유추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강한 충돌의 힘만큼 역동적인 생명력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은 결코 부딪힐 수도 없으니까요. 파괴냐 생명이냐, 이 딜레마 앞에서 ‘충돌하는 에너지는 곧 살아있음을 의미한다’는 추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3) 쉽게 칠해지지 않은 그림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가까이서 붓 자국의 질감과 희미하게 번져나가는 경계를 관찰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단순한 색의 배열인 그의 그림들이 즉흥적인 붓질 몇 번으로 쉽게 그려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꽤 정교함이 느껴집니다. 건조한 붓 자국들이 얇은 레이어처럼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작가는 옅고 반투명한 물감층을 여러 번 쌓기 위해 정교한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면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그림을 응시하며 생각했다고 합니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이 되기도 했지요. 이를 통해 그의 그림들이 결코 쉽게 칠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빨강 위에 빨강, 검정 위에 검정을 그려 미묘한 색의 차이를 애써 만들어낸 작품들도 있습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는 더욱이 색의 경계가 명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색인가?’, ‘혹시 자세히 보면 어떤 패턴이 숨어있나?’ 싶어, 조그만 실마리라도 발견해 보려 동공을 크게 확장해 봅니다. 이 어둠 속의 호기심은 마치 작가가 던져 놓은 덫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멍 때리기 좋은 그림이다.’ 스마트폰 속 시각적 소음의 덫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정지된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
종종 어떤 이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고도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자신과 동일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 경험이란 무엇일까요? 예술을 마치 종교처럼 숭고하게 여기는 작가정신이 누군가에게는 유난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을테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정말로 예술만이 유일한 종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비극적 결말을 아는 이들에게는 켜켜이 쌓인 붓 자국들이 마치 비극으로 향하는 발걸음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다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몰랐더라도, 그의 그림은 감상자 각자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창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에는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죠.
“Black on Gray” 작품으로만 가득 찬 방에서 밤바다를 연상하는 데에 그리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등대나 어선 불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이 움츠러듭니다. 생을 마감하기 몇 달 전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더라도, 이 아스라한 수평선 앞에서는 내면으로 서서히 침잠하는 에너지를 느낄 테지요. 다만 이것이 죽음인지 평화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죽음과 평화, 두 단어가 같은 의미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 그의 그림을 마주하고 ‘작가가 너무 우울해서 이렇게 어두운 색을 사용했구나’ 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게다가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에도 “No. 3(1967)”과 같은 주황색과 빨간색을 사용하여 매우 화사한 그림을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어두웠을 시기에 어떻게 이런 밝은 색을 사용했는지 그 이유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색이란 그의 복잡한 감정을 최대한 납작하게 표현하는 매개체라는 사실만 추측해 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삶을 추적하기보다 모호한 색의 숲에서 그와 평행선의 여정을 홀로 걸어가 보는 것입니다.
로스코의 전시장은 유난히 고요하고 적막합니다. 전시장은 늘 관람객으로 붐비지만, 그들은 자신의 말소리가 혹여나 옆 사람의 소중한 침묵을 깨트릴까 봐 조심스러워합니다. 마치 로스코의 캔버스 위에서 모호하지만 절대 닿지는 않는 색의 경계처럼, 관람객들도 보이지 않는 서로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덕분에 로스코의 전시장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적 경험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작가는 죽음으로써 평화를 찾았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 앞에서 평화로운 순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제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합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여전히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 멈춘다)
남자 A: 분명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을 거야.
남자 B: 아닐지도. 그냥 경험하는 거야. 보고 있으면 뭔가 느껴지지 않아? 무언가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너도 빠져들 거야.
남자 A: 응, 정말 그런 것 같네. 누가 말해줬어?
남자 B: 이게 누가 말해줄 수 있는 거겠어?
남자 C: 다 의미 없어. 가자.
_AMC 드라마 <Mad Men>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