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더빙 영화라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인지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국내 영화관에 개봉하는 더빙 영화는 <슬램덩크>, <인어공주> 등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는 극소수의 애니메이션뿐이었다. 반면 해외의 경우,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으로 자막보다 더빙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하다. 중국과 일본 등 가까운 아시아 국가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국가에서도 외국어 더빙이 주류 문화인 경우가 많다. K-콘텐츠의 인기가 해마다 증가하며 한국어로 제작된 영화가 해외에서 수많은 외국어로 더빙되어 널리 퍼지는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자막만이 생존하고 더빙 영화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 더빙 영화가 사라진 이유
1) 자막에 적합한 한국어의 특장점
국내에 더빙 영화가 사라진 이유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먼저 언어학적 관점에서 한글은 영화 자막 표현에 상당히 용이한 언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글은 한자어를 빌려 문자 압축률이 뛰어난 언어다.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 보다 한글로 표기한 단어가 음절이 적어 문장이 짧다는 특징은, 배우들의 긴 대사를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에서 꽤나 큰 차이를 보인다. 대사의 호흡에 의해 빠르게 사라지는 대사를 놓치지 않고 읽으며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한글의 특장점 덕분이다.
또한 한국어는 맥락을 바탕으로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는 언어라는 점에서 문장의 길이까지 압축되는 특징이 있다.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Did you have dinner?”라는 질문을 “밥 먹었어?”라는 자막으로 옮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가 함축된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 한글의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점도 자막 문화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24개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은 상대적으로 가독성이 뛰어나, 대사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2) 더빙 문화의 쇠퇴
국내에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는 열악한 제작 환경과 연기력 문제로 후시 녹음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TV 프로그램에서도 배우들이 녹음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전문 성우들이 등장해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성우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영어 교육 수준과 함께 교육열이 거세졌고, 인터넷을 통해 영문 콘텐츠가 유입되기 시작하며 외국 문화 및 영어 이해도가 상승했다. 이는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예술 작품과 길거리 간판까지 한글 대신 영문이 쓰이는 언어 사대주의로 번지기도 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더빙 영화가 어색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제작된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경향과 달리, 더빙을 거친 작품을 기피 현상이 급증한 것이다.
더불어 한국어 더빙을 위해 들이는 비용이 자막 제작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는 이유로 방송국과 영화 시장에서 더빙 문화는 더욱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소비자의 대다수가 자막을 선호하는데, 구태여 더빙을 제작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오직 공중파 방송국에서만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등 외국어를 더빙한 외화 시리즈를 방영했으나, 마지막 남은 외화 더빙 프로그램이었던 KBS <명화극장>을 끝으로 현재는 모두 폐지되었다.
자막 문화의 양면성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이 완전히 다른 영혼과 몸을 소유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합류한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_장 르누아르(Jean Renoir)
그렇다면 외국어로 제작된 영화를 감상할 땐 자막 버전이 확실히 더 좋은 선택일까? 자막 영화가 음향 측면에서 영화를 가장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방법임은 틀림없다. 외국어를 번역해 더빙하는 과정에서 영화감독이 의도했던 소리의 디테일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인물이 구사하는 언어의 억양이나 특징이 왜곡될 수 있다는 위험성 등을 고려했을 때 자막이 더 좋은 선택지인 것으로 보인다. 립싱크 문제는 물론, 배우의 연기력과 영화의 메시지 전달력을 해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존하고 외국어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막 감상 문화의 특징은 가독성이 좋은 한글의 장점과 더해져, 오늘날 국내 영화 감상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한 편의 영화는 만약 자막이 있으면 15퍼센트의 힘을 잃고, 잘 더빙된다면 10퍼센트의 힘을 잃는다.”
_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일각에서는 더빙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자막은 영화 감상에 있어 시각적 방해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읽는’ 것이 아닌데 과도한 텍스트가 작품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막을 읽다가 인물의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선, 배경의 미묘한 변화 등을 놓쳤다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더빙이 자막에 비해 시각적 몰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한 더빙은 단순히 외국어로 제작된 영화를 감상하는 한 가지 방법을 넘어서 성우와 더빙 기술이 접목된 하나의 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독일과 일본 등 더빙 문화가 강세인 국가에선 성우의 팬층이 두텁고, 더빙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소비하고 즐기는 감상자들이 많다는 점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영화 감상 방법의 선택권
더빙 영화의 장점이 있음에도 여전히 국내에선 자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으로 예상한다. 영화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자막을 선호하는 이유 중 ‘원본 그대로를 감상하기 위함’이라는 답변에 이어, 높은 비율을 차지한 답변은 ‘더빙에 대한 거부감과 자막에 대한 익숙함’이었다. 우리나라도 더빙이라는 선택지가 자막만큼이나 오랫동안 공평하게 제공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자막이 여전히 대세일지라도 답변 내용이나 비율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영국영화자문위원회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더빙과 자막 중 취향에 따라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이야말로 다수의 청중을 유치하고 영화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나라의 자막 선호도는 약 83.7%라는 결과가 있다. 그러나 자막 감상 문화가 압도적 주류인 국내 영화 시장에서 정작 더빙이 필요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일 확률이 높다. 시각장애인, 문맹, 노년층 등 한국어를 구사하는 목소리를 ‘선호’가 아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노년층의 문화예술 활동은 주로 음악, 연주회, 박물관, 미술관에서 두드러지는 반면 영화의 경우 전체 연령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율을 보인다. 체력이나 건강상 이유라는 의견이 24.9%로 전체 연령(6.8%)보다 3.7배나 높다. 이를 자막을 읽기 어렵다는 것으로만 해석할 순 없지만 자막의 크기나 속도 등을 고려했을 때 노년층이 자막 영화를 향유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해석은 신빙성이 있다. 외국 영화를 감상할 때 자막이냐 더빙이냐, 취향을 논하기 전에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몇 해 전 독일의 한 영화관에서 미국 영화를 독일어 더빙으로 본 적이 있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더빙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같은 영화를 한국어 더빙으로 본다면 어떨까? 괜히 어색할 것 같다. 더빙 버전으로 본 적도 없고, 볼 수 있도록 제작된 환경도 아니지만 선입견이 자리 잡은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편협한 시각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고 한국에 거주하기 때문인지 대다수의 취향처럼 자막 영화를 선호하지만, 마음속 최애 외국 영화는 한 번쯤 더빙으로 즐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본다.
- ‘영화를 볼 때 자막과 더빙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GQ매거진, 2023
- ‘오징어게임이 다시 불붙인 ‘더빙 VS 자막’ 논쟁…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nate뉴스, 2021
- ‘갓 쓴 주지훈을 금발 성우가 연기… 더빙으로 뻗는 K드라마’, 중앙일보, 2020
- ‘더빙 VS 자막, 그것이 문제로다!’, 외교부, 2020
-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소비자조사 보고서 2014
- ‘노년층의 문화예술 관람 경험과 특성’, 한국의 사회동향 2013
- ‘문장 구조(어순)와 의식 구조 사이의 상관관계: 한국어와 영어 비교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