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비슷하게 느껴지던 일상이 문득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제와는 미묘하게 다른 오늘 아침의 하늘빛이나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가까운 것은 빠르게 먼 것은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의 깊이감 같은 것이요. 나무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갈라지고, 강 표면의 윤슬은 지글지글 반짝이고, 햇빛에 물든 하늘에서 색이 변하는 경계선을 발견합니다. 이런 순간은 일상의 권태를 잊고 지금을 살게 합니다. 평평했던 일상이 여러 레이어로 분리되며 삶에 대한 새로운 감흥과 영감을 불러일으키죠. 하지만 나라는 일인칭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이런 순간을 매일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고 권태는 지겹게 찾아옵니다. 잠시 일인칭의 시선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각자의 각도로 고개를 꺾어 일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빌려보는 겁니다. 평평하게 보였던 일상에 물음표를 던지는 예술가의 시선이 담긴 예술 서적 3권을 소개합니다.
황포치,
『500그루의 레몬나무』
나무를 심는 일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500그루의 레몬나무』는 대만 출신 작가인 황포치의 ‘500그루의 레몬나무’라는 프로젝트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황포치는 가족과의 대화 중 얻은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전시를 통해 모금을 받아 버려진 땅에 레몬 나무 묘목을 심어 지역 농부들과 키워냅니다. 이 과정에서 레몬과 함께 재배된 여러 이야기를 포착해 자신만의 노하우로 아름답게 채집하죠. 시간이 흘러 수확한 레몬으로 만든 술과 모은 이야기를 엮은 책을 전시에서 제공하여 재배, 생산, 소비라는 일상을 예술과 절묘하게 겹쳐냅니다.
예술가와 작품, 큐레이터, 전시회 그리고 관람객 사이에는 상업적 혹은 비영리적인 자원의 흐름이 존재합니다. 황포치는 이런 예술적 자원에서 애써 멀어지려 하기보다 이를 효율적인 수단으로 바꿀 것을 제안합니다.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야기와 기술, 땅을 예술적 원천으로 삼아 재탄생시키는 것이죠. 과일을 채집하고 재배하고 생산하며 동시에 이야기를 인터뷰하고 글을 작성하고 또 책을 출판합니다. 이 과정에서 예술적 자원은 돈을 버는 수단을 넘어 가족, 현지 농부, 소비자를 예술 프로젝트를 위한 중요한 연결고리로 삼습니다. 500그루의 레몬 나무가 예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황포치가 삶에서 발견한 예술적 원천을 그의 글을 통해 만나보세요.
“글을 통해 그리고 다섯 코스의 식사와 세 잔의 술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이전보다는 예술을 우리 가까이에 둘 것임은 분명합니다. 예술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또는 예술의 존재 유무와도 상관없이, 여러분을 모시고 과수원에서 모두 함께 점심을 즐겼으면 합니다.”
_『500그루의 레몬나무』
브리기테 슈스터,
『스위스의 고양이 사다리』
다양한 존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상상력일지도 모릅니다. 스위스 베른에는 집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가는 외출냥이를 위한 고양이 사다리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진가 브리기테 슈스터는 그가 발견한 다양한 고양이 사다리 사진과 고양이 사다리에 대한 보고서를 엮어 사진집으로 출간했습니다.
발판을 끼운 사다리, 나선형 나무 계단, 지그재그 사다리, 접이식 사다리, 자연물을 활용한 사다리 등, 책에 수록된 사다리 사진을 보다 보면 우선 그 형태의 다양함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의 다양한 상상과 실천을 볼 수 있습니다. 브리기테는 스위스 문화에서 고양이와 인간의 관계를 들여다본 보고서를 책에 수록하고 고양이 사다리를 주변 도시 경관과 어우러지게 사진으로 담아냄으로써 이 도시가 어떤 식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말합니다. 책을 통해 동물과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가에 관한 즐거운 상상을 만나보세요.
“자유를 사랑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스위스의 집사들은 자신의 욕구와 행동을 반려동물에게 투사하는 데 고양이 사다리를 활용합니다. 비록 투사라고는 해도 집사와 고양이 양쪽 모두 고양이 사다리로부터 실질적인 이득을 얻죠. 고양이 사다리는 자유를 가져다주니까요. 밖으로 나가는 것에 익숙해진 고양이들은 독립적으로 건물을 드나들 수 있고, 집사들은 고양이를 들으기 위해 집에 머물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고양이 사다리가 설치된 베른의 건물들 자체가 더 많은 건물주에게 자발적으로 사다리 설치를 허용하라고 요구하는 하나의 발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_『스위스의 고양이 사다리』
윌리엄 물란,
『ODD APPLES』
흔하게 접하는 사물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는 일은 때때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ODD APPLES』는 영국의 사진가 윌리엄 물란이 발견한 개성 있는 사과들을 모은 사진집입니다. 윌리엄은 런던 외곽의 웨이트로즈 식료품점에서 흠집이 난 감자 모양의 특이한 사과를 발견하고 그 사과의 견고한 맛에 매료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사과에 집착에 가까운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희귀한 사과 품종을 찾아 그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는 여러 기법을 이용해 사과의 고유한 모양, 향, 맛 등의 특성을 담아냅니다. 배경색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사과 표면의 매끈함이나 주름, 반짝거리는 상태를 빛을 이용해 강조하거나, 껍질을 벗겨내고 사과를 반으로 잘라 단면을 보여주는 연출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이 사진들은 흔한 과일로 여겨지는 사과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사물에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는 것은 물론, 조형 사진 그 자체로 매력을 가집니다. 집요하게 관찰한 사과의 특성을 조형 사진의 아름다움을 활용해 표현한 사진집을 통해 일상에서 새로운 영감을 발견해 보세요.
나무, 사다리, 사과. 지극히 일상적인 존재들이 깊은 사유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다시 음미해 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던 날들은 왜 비슷한 모습으로 짐작되고 있었던 걸까요? 한 번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나무를 심는 일에서 예술을 고민하고,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상상하고, 일상의 파편을 자세히 관찰해 봅니다. 책을 덮으면 나는 여전히 나인 채로 다만 새로운 세계를 내 안에 들였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의 권태에서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외부 세계의 커다란 변화가 아닌 내 안의 작은 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