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루브르가 케이크와 장미꽃으로 인해 들썩거렸다. 루브르의 상징과도 같은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케이크로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나리자는 방탄유리 벽으로 인해 무사했으나, 유리 위에 케이크를 문지른 남성은 지지치도 않고 장미꽃을 허공에 던지며 소리쳤다.
“지구를 생각하라!”
지구를 생각하라. 어쩌면 이는 단순한 소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의 행동이 모나리자를 훼손하려 한 범죄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예술계 역시도 이 외침을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삶과 떨어질 수 없다.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며, 그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예술은 필연적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지구는 빠르게 병들고 있으며, 인류는 그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예술과 예술 산업 역시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과 함께 가는 미술은 어떤 모습인가
1) 현실로 닥쳐온 기후 변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 배출이 급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지구는 유례없는 몸살을 겪고 있다. 그린란드 빙하는 2000년대 들어 연간 500기가톤의 얼음을 유실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해수면은 매년 3.68mm씩 상승하고 있다.
이상기후는 심지어 인류의 식량 자원마저 뒤흔들고 있다. 2022년 지구 곳곳에 나타난 이상기후로 인해 전 세계 곡물 생산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흉작이 겹치며 곡물 가격은 2022년 3월 기준 전년 대비 52.3%가 올랐다. 이미 코로나19로 인해 심해진 식량난이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더욱 악화할 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국제 무역이 발달하고 초국가적 연결이 심화된 21세기에 기후변화는 국가를 뛰어넘어 전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예술도 이러한 문제에 반응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는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1960년대 등장한 환경미학은 이미 자연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예술을 비평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예술적 실천을 촉구하고 있었다.
2) 자연과 소통하는 대지미술
이러한 경향에 힘입어 등장한 것이 60년대의 대지미술(Earth Art)이다. 대지미술은 상업화되는 미술계에 대한 반발과 환경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등장했다. 대지미술가는 정형화된 화랑에서 뛰쳐나와 땅으로 돌아가는 예술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대지미술 작품이 바로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의 방파제”다. 나선형의 방파제는 미국 유타주 그레이트솔트호수에 설치된 거대한 야외 작품으로 호수의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지금도 조금씩 환경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 ”나선형의 방파제”는 과거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추었으나, 2005년 호수의 수면이 낮아지자 다시 모습이 드러났다. 현재 그레이트솔트 호수를 방문하면 방문객들은 직접 작품 위를 걸어볼 수 있다. 미술이 자연과 인간을 감각적으로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지미술의 특징은 미술이 자리 잡은 환경과 반목하지 않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대지미술가들은 주로 자연환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재료(나뭇잎, 가지, 흙, 돌 등)를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든다. 그들은 작품이 자연 속에서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지미술가 앤디 골드워시는 민들레와 단풍 같은 자연물을 이용해 작품을 구성하고 그들이 시간이 지나면 말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자연물이 미술이 되고 다시 대지의 거름으로 돌아간다. 대지미술은 그러한 속성을 통해 생명이 태동하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적 시간을 이야기한다. 산업화 이후 초와 분으로 나뉜 시간이 다시 자연스러운 주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3) 지속 가능한 전시 문화의 발전
20세기 후반의 미술이 전시장을 떠나 대지 위에서 상호작용하기를 추구했다면, 21세기 현재 환경문제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은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왔다. 많은 전시가 이제 지속 가능한 예술을 목표로 편리성만을 추구했던 과거의 관행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환경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이 2021년 진행한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은 단순히 환경문제를 전시 주제로 다루는 것에서 한발작 더 나아가 전시 환경 자체를 바꾸었다. 이 전시는 주요 작품 6점을 항공이 아니라 해상으로 운송했다. 막대한 무게가 나가는 6점의 작품은 모두 해운으로 뉴욕에서 한국까지 배송되었다. 작품이 해상으로 운송된 덕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항공 운송의 1/40 가량으로 줄일 수 있었다. 또한 폐기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시에 석고벽, 페인트, 시트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전시는 불필요한 홍보물의 인쇄 역시 최소화했으며 인쇄에는 콩기름 잉크와 친환경 종이를 사용했다. 전시의 기획자는 “미술관의 다양한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미술관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현실적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라고 전시를 설명한다. 아름다운 조명, 화려한 안내서, 커다란 가벽이 마치 미술 전시의 미덕처럼 여겨지던 과거의 관행에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은 새로운 전시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저항하고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자연의 신음을 잊은 도금된 전시회, 그것이 과연 최선이었는가.
예술의 목적이 물론 환경운동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와 주고받는 불가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예술은 사회에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이 사회와 유리되고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세계, 그것이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지금까지 기술 발전은 자연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발전이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는 21세기, 기술은 다시 자연과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예술 역시도 이러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석탄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미술품 운송 방법은 없을까, 전력 소모를 최소화해 만들 수 있는 NFT 작품은 어떤 기술을 이용해야 할까, 종이 도록을 대체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예술계가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예술과 전시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인상주의 이후의 흐름이라는 뜻을 지닌 ‘후기 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는 영국의 화가이자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가 1910년에 기획한 전시 제목 <마네와 후기인상주의(Manet and Post-Impressionism)>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대략 1890년에서 1905년 사이의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고흐, 고갱, 세잔이 있다. 후기 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생생하고 찬란한 색채와 독특한 붓질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지나치게 순간적인 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 고전주의(Classicism)는 본래 조화와 균형, 비례를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사조를 뜻하나 이를 이어받은 르네상스 시대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출현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과 같이 이론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미술사조를 통칭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낭만주의(Romanticism)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신고전주의로 이해할 것을 권장한다. 자유롭고 정서적인 낭만주의와는 대조적으로 고전주의 미술은 형식과 법칙을 엄격히 지켰다.
- 19세기 초 시작된 낭만주의(Romanticism)는 흔히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로 소개된다. 신고전주의 미술이 질서와 규범에 입각해 선과 형태를 중시했다면,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감성과 직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색채 사용을 선호했다.
- 한겨레, “그린란드 빙하, 돌아오지 못할 강 건넜다”, 2022.01.13.
- 연합뉴스, 기후변화와 코로나의 ‘협공’…커지는 지구촌 식량대란 위기, 2022.01.30
- MBC, ‘모나리자’에 케이크 테러‥30대 남성 정체는?, 2022.05.30
- 부산현대미술관,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 2021.05
- 월간미술, 세계미술용어사전,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