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럭키비키잖아!”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며 ‘오히려 럭키야’라고 말하는 ‘럭키비키‘ 밈(meme)이 온오프라인을 강타하고 있다.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자신의 앞에서 빵이 품절되자 “덕분에 따뜻한 빵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긍정적으로 답변한 것이, 장원영의 영어 이름 ‘비키’와 합쳐져 ‘럭키비키’ 밈으로 탄생한 것이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원영적 사고’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해당 밈이 화제가 된 것은 장원영이 단순히 톱스타이기 때문이 아니다. 장원영이 팬들과의 소통, 브이로그 등 다양한 환경에서 꾸준히 긍정적인 사고와 화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020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원영적 사고’는 물론, 장원영까지 ‘워너비’로 삼으며 팬이 되기를 자처하는 또래 여성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실제로 2022년 발표된 아이브의 히트곡 ‘러브다이브’의 지니뮤직 이용자별 통계를 확인하면 이용자의 55%가 여성이다.
‘보이그룹=여성 팬, 걸그룹=남성 팬’은 K-POP 산업의 오랜 공식이었다. 하지만 2024년 여성 팬들은 보이그룹이 아닌 걸그룹에 푹 빠져있다. 여성 팬들은 왜 걸그룹을 사랑하게 됐을까?
여자도 걸그룹을 좋아하나요?
현재의 K-POP 아이돌은 다인원으로 구성된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을 지칭하는데, 19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K-POP 아이돌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전국적인 신드롬을 일으킴과 동시에 또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팬덤이 형성됐다. 1세대 아이돌인 H.O.T, 젝스키스 등이 데뷔하며 10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팬덤이 본격화되며, 아이돌의 역사가 이어져 왔다.
아이돌을 세대별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한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돌 그룹이 탄생하면, 해당 아이돌 그룹의 데뷔를 중심으로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라 1세대는 1990년대, 2세대는 2000년대 초, 3세대는 2010년대, 4세대는 2020년대로 구분하여 지칭하고 있다.
대규모 팬덤을 형성한 보이그룹 팬덤의 주축은 또래 여성으로, 다수의 보이그룹이 여성 팬을 타깃으로 팬덤 마케팅 활동, 컨셉 등을 선정해왔다. 걸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걸그룹이 ‘첫사랑’의 이미지를 스타일링을 통해 구현하거나, ‘오빠’라는 단어를 가사에 직접 삽입하는 등의 전략을 취해왔다.
걸그룹이 점차 개성을 잃어간다는 지적이 이어지던 2017년, 오랫동안 아이돌을 연구해 온 김수아 교수는 ‘청순’ 콘셉트의 걸그룹이 다수 등장한 이유에 대해 “그게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보이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팬덤의 규모가 크지 않은 걸그룹의 경우 대중적 인지도 상승에 초점을 둘 수 밖에 없고, 특히 자본이 부족한 중소 기업사의 경우 남성 팬을 적극 공략해 온라인 입소문을 노린다는 설명이었다.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 팬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눈에 띄는 점은 여성 팬이 많은 걸그룹의 특징은 털털하고 예쁜 척 하지 않는 이미지가 여러 미디어를 통해 강조됐다는 점이다.
‘실력파 그룹’을 내세운 2NE1 또한 당대 유행하던 섹시나 청순 대신 ‘걸크러시’ 콘셉트를 고수했다. 원피스 대신 레깅스를 걸친 패션 또한 화제가 되었는데, f(x) 또한 멤버 엠버를 통해 중성적인 그룹 이미지를 강조하며 예쁜 외모보다 개성이 강조됐다. 개성있고 당당한 이미지는 여성 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2NE1의 경우 ‘UGLY’를 통해 당시 걸그룹에겐 금기와 같던 외모콤플렉스를 직접 노래해 많은 1020 여성 팬들의 공감을 얻었다.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던 걸그룹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 ‘나’를 대변한다는 감정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결국 ‘솔직함’이 걸그룹과 여성 팬덤을 있는 다리가 되었다.
유튜브 시대의 개막과 오디션 프로의 성행은 걸그룹의 ‘솔직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유튜브 시대가 열리며 걸그룹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채널을 얻게 되었고, 대중의 투표를 통해 선발되는 오디션 프로의 출연진들 또한 “센터가 되고 싶다”, “탈락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는 등 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팬들의 지지를 얻었다.
‘오빠’ 대신 ‘언니’
4세대 걸그룹에 이르러서는 몇몇 팬덤의 경우, 여성 팬의 파워가 두드러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구매력과 충성심을 자랑하는 여성 팬덤은 전무후무한 4세대 걸그룹 신드롬의 주역이라 평가받는다.
2022년, 걸그룹 에스파의 두 번째 미니앨범 ‘걸스’의 선주문으로 161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림과 동시에 142만 장의 초동 판매량을 기록하며 K-POP 걸그룹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초동’이란 앨범 발매 첫 일주일을 말하며, 초동 판매량은 이 기간의 앨범 판매량을 말한다. 팬덤의 화력을 알아볼 수 있는 지표다.a) 여러 매체에서 에스파의 성공 요인으로 강력한 여성 팬덤을 꼽았다. 에스파는 데뷔곡 ‘블랙맘바’부터 ‘걸스’까지,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걸크러시 컨셉을 유지하며 많은 여성 팬을 확보했다. 또한 보이그룹에서 주로 활용하던 거대한 ‘세계관’을 차용해, “걸그룹에서 못 보던 스케일”이라는 찬사와 함께 보이그룹의 문법에 익숙하던 여성 팬덤의 깊은 몰입까지 유도했다.
또 다른 걸그룹 신드롬의 주인공인 아이브는 ‘에프터 라이크’를 통해 초동 하프 밀리언 셀러에 등극했는데, 알라딘 음반 홈페이지에 기록된 세 번째 싱글앨범 ‘애프터 라이크’ 예약판매 비율을 보면 구매자의 68.7%가 여성에 해당한다. 아이브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먼저 데뷔했던 멤버 장원영과 안유진의 활발한 개인활동을 중심으로 많은 여성팬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022년 시상식에 참여한 아이브는 “오늘 MMA에 참여한 소감을 전 세계 웅니(언니)들한테 말해줘”라 질문을 받고 “웅니 사랑해”라고 답했다. 이러한 사례는 걸그룹 팬덤의 주축이 ‘오빠’에서 ‘언니’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걸그룹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렇다면 여성 팬들은 어떤 모습으로 걸그룹을 사랑하고 있을까?
첫째, 앞서 이야기했던 2NE1의 사례처럼 롤모델로 걸그룹을 좋아하는 것이다. 장호추(2021)는 연구논문을 통해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 팬과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며, 인터뷰 대상자들이 걸그룹을 동경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들이 동경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걸그룹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는 당당한 성격이다. 특히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상처받는 경우, 걸그룹 멤버를 통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이다. 어린 자매 중 동생이 언니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동경하는 걸그룹처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따라 하기도 한다. 이때 여성 팬들은 연예인의 실수와 아픔에 공감하고 외모가 아닌 능력에 기반한 성취에 자부심을 느낀다.
둘째, 新 가족주의적 모습이다. 여성 팬덤은 걸그룹을 향해 ‘언니’부터 ‘이모’, ‘할미’까지 다양한 가족 호칭을 사용해 친근감을 드러낸다. 단순히 걸그룹을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걸그룹의 성공을 위해 모금, 투표, 앨범 구매 등 다양한 서포트 활동을 진행한다. 동경에 중점을 둔 롤모델과 달리, 팬덤 활동에 조금 더 깊이 몰입한 모습이 특징이다. 아이브의 20∼30대 여성 팬들은 어린 나이의 아이브 멤버들을 ‘아기’에 빗대 ‘아기브’(아기+아이브), ‘갓기’(God+아기) 등으로 부르며 마치 한참 어린 동생이나 딸을 키우는 느낌으로 이들을 응원한다.b) 때로는 여성 연예인이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매애, ‘유사 육아’라는 단어로도 설명되는 모성애와도 닮아있다.
셋째, 걸그룹의 메시지에 이입하는 것이다. 최근 걸그룹의 메시지는 사랑받고 싶은 수동적인 소녀나 이성을 유혹하는 여성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원하면 감히 뛰어들어’(아이브 ‘러브 다이브’), ‘확실하게 나로 만들겠어’(뉴진스 ‘어텐션’), ‘난 독을 품은 꽃 네 혼을 빼앗은 다음’(블랙핑크 ‘핑크 베놈’) 등에서 주체성을 강조하고, ‘내 장점이 뭔지 알아? 솔직한 거야!’(애프터 라이크) 라는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둔다. 현재의 자신과 다른 걸그룹을 롤모델로 삼는 것과 달리, 걸그룹의 메시지에 ‘나와 같다’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워너비 소녀’로 완전무결한 모습만 보여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 또한 실수하는 인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배우 고현정과 최화정이 각각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해줄지 몰랐다”는 감회를 밝혔다. 두 사람의 유튜브 채널에는 “언니처럼 살고 싶다”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팬들의 목소리가 켜켜이 쌓여있다. 이는 걸그룹을 ‘언니’라 부르는 수많은 소녀들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걸그룹이 콘셉트와 달리 실제로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거나, 과도한 다이어트, 선정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등 혹평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걸그룹과 배우를 ‘언니’라 부르며, 혹은 ‘언니’가 되길 자처하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자 동반자에 대한 갈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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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호추, 「걸그룹의 미디어 재현과 여성 팬의 수용에 관한 연구: 세대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를 중심으로」 2021, 한양대학교, 석사학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