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프라이빗한
문화예술 도피처

모두의 공간 나만의 장소
헤테로토피아를 찾아서
Edited by

출근길 지하철 속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에 빠져있습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거나, 책을 펼쳐 들고 있거나, 웹툰이나 유튜브를 보면서 말이죠. 출근을 포기할 순 없으니 소음 가득하고 발 디딜 틈 없는 곳으로부터 각자의 가상 세계로 도피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시끌벅적한 현실에서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국내 전체 가구 유형 중 1인 가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독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역설적인 욕구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아시다시피 도심에서 물리적으로 온전한 ‘혼자’가 될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타인과 영역을 나눠쓰는 공간에서 나만의 ‘장소’를 누릴 방법은 없을까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실존하지 않는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며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나만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상조


가상 세계로 연결된 옷장

헤테로토피아
이미지 출처: 월트 디즈니 픽쳐스

어릴 적 부모님 몰래 옷장 속으로, 혹은 담요를 씌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겨본 적이 있다면 이미 헤테로토피아를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그때의 감각이 명확히 떠오르지 않을 수 있지만, 비밀스럽고 안온한 분위기이며 지극히 사적인 장소임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겠죠. 이처럼 미셸 푸코는 ‘아이들은 헤테로토피아를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설이자 동명의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이들이 옷장을 열어 판타지 세계로 가는 문을 발견하는 것처럼요. 영화 속 아이들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옷장을 통해 마법이 펼쳐지는 세계로 넘나들며 극적인 장소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헤테로토피아는 본인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상 세계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현실 세계의 공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지트, 쉘터, 케렌시아, 비밀기지’라고도 부를 수 있는 도심 속 프라이빗한 공간이자,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곳입니다. 옷장이나 담요 덮은 책상에 숨어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동심이 사라졌더라도 괜찮습니다. 책, 음악, 영화 등 흥미로운 문화 예술 콘텐츠를 곁들인 공간이라면 일종의 ‘나만의 도피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제부터 혼잡한 도심에서 나만의 헤테로토피아를 체감해 볼 수 있는 문화예술 도피처로 안내해 드립니다.


일인용( ) 1P( )

오롯이 1인이 될 수 있는 일인용( ) 1P( )는 시간을 예약해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공간을 예약해서 시간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혼자는 물론 둘까지 방문할 수 있으며, 미리 음료와 책을 예약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예약한 일정에 맞춰 방문하면 책을 선별한 이의 시선을 뜻밖의 감각으로 만나볼 수도 있는데요. 바로 큐레이터가 구축한 음악 트랙 리스트입니다. 작은 굴처럼 느껴지는 안락한 공간에서의 책과 음악은 마치 한 쌍인 것처럼 어우러져 새로운 공감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죠. 잘 정돈된 가상의 세계로 초대받는 느낌입니다.

일인용( ) 1P( )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일 뿐, 서촌을 오가는 분주한 행인들은 시야에 걸리지 않습니다. 방금까지 걸어왔던 서촌 골목길과 현실은 잊고, 그저 시간과 바람이 흐르는 걸 관망할 뿐이죠. 혼자만의 시공간을 확보했으니, 온전히 책이나 음악에 집중해 볼 수도 있고 나와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곳에서의 한두 시간이 전체 일상에선 한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한 조각이 절실한 사람들에겐 최고의 도피처이자 헤테로토피아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인용( ) 1P( ) 예약 페이지
INSTAGRAM : @1p_news


블루도어북스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사이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이 책방은 길거리에 ‘Bluedoor books’라는 액자를 하나 걸어놨을 뿐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습니다. 건물의 후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수상하리만큼 복도 끝에 위치한 나무 문이 하나 있을 뿐이죠. 그러나 예약된 시간에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누군가의 비밀 서재에 들어온 듯한 생경함이 들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공간을 실제로 마주하니 정적인 흥분이 감돌기도 합니다. 입구에서는 웰컴 드링크와 함께 내어주는 빈 종이 명찰에 자신을 자유롭게 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요. 현실 세계와 차단된 이곳에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블루도어북스는 소문내지 않고 몰래 가고 싶은 마음과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서로의 시선이 포개어지지 않도록 배치한 자리, 섬세한 책 큐레이션과 곳곳에 배치된 QR코드를 이용해 조용하고 다정한 소개말, 자리마다 음료와 등불을 놓아주고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직원들에게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배려심이 느껴집니다. 또한 블루도어북스는 우주를 감상하거나, 오일 파스텔로 낙서를 하고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뒀습니다. 영화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아늑한 자리도 있죠. 현실에서 동떨어져, 순수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놀이공원 같기도 합니다.


블루도어북스 예약 페이지
INSTAGRAM : @bluedoorbooks_theoriginal


오르페오

헤테로토피아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복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장소에 실존하는 공간과 가상의 공간이 나란히 배치될 때도 있죠.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영화관입니다. 이차원 스크린을 통해 삼차원 영상이 영사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 고정된 장소에 앉아 있으면서 스크린 속에서 무수한 장소의 변화를 감상하는 행위는 기묘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E열 6번’처럼 어쩌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나만의 장소를 찾는 방법은 영화를 예매하는 것일 수 있죠. 게다가 영화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적 요소가 중요한 예술인 만큼 보다 공감각적으로 문화예술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극강의 청각적 몰입을 선사하는 세계 최초 사운드씨어터 오르페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음악가이자, 시인 ‘오르페오’의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음악을 보고 영화를 듣는 공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음향이 잘 갖춰진 영화관이죠. 사운드 엔지니어들에 의해 설계되었고 덴마크 스타인웨이 링돌프 스피커가 34개 배치되었다는데, 30석 규모임을 고려하면 관객보다 스피커가 많은 상영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음향이 주는 몰입감을 체감할 수 있는 영화관입니다. 음악이 훌륭한 영화일수록 오르페오를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네요. 프라이빗한 좌석에서 시청각적으로 구현되는 새로운 장소를 감상하고, 빠져들어, 헤테로토피아 속 나만의 장소를 확보해 보시길 바랍니다.


INSTAGRAM : @ode.orfeo


책과 음악, 영화가 있는 공간은 한 장소 안에 모든 것을 축적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문화예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대와 시간, 장소, 취향이 담겨 있고, 우리가 그중 하나를 골라 감상하면 고정된 장소에서 다양한 장소에 머무를 기회를 얻는 셈이니까요.

옷장에 숨어 들어가기에 몸집이 커져 버린 우린 바쁘고 소란스러운 현실 세계에 내던져졌습니다. 여전히 옷장과 놀이터, 인디언 텐트, 다락방 같은 ‘나만의 장소’가 필요한데 말이죠. 보다 윤택한 일상을 위해 소개해 드린 문화예술 도피처 세 곳이 각자의 헤테로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는 옷장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Picture of 상조

상조

좋아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걸 조합하며 살아갑니다.

에디터의 아티클 더 보기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과 협업하고 싶다면

지금 ANTIEGG 제휴소개서를 확인해 보세요!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