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는 단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보르헤스의 진가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죠. 활동 배경을 고려해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라 붙이기도, 현실을 초월하는 설정만으로 그의 작품을 환상 문학이라고 한정 짓기도, 아르헨티나 출신이라고 단순히 라틴 문학의 선구자라 부르기에도 아쉽습니다.
난해한 서사와 당혹스러운 세계관. 낯선 독서 경험으로 사고의 한계를 마주하게 하는 보르헤스는 20세기 최고로 박식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그가 문학의 주류였던 영미권 작가가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보르헤스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과 이 우주를 생경하게 감각하게 해주는 데 탁월한 작가라는 사실입니다.
보르헤스의 시와 소설을 처음 접한다면 우리 통념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설정에 좌절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티클에서는 보르헤스가 남긴 각종 에세이와 인터뷰집, 강연문을 인용하며 대표작에 대한 해제와 동시에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압축적으로 소개합니다. 그의 삶을 넌지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보르헤스가 전하려 했던 형이상학의 개념은 단순히 현학적 고민이 아닌,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품고 있는 삶에 대한 갈망,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난해한 글이 안겨주는 지성의 확장과 사고의 전복이 얼마나 눈부신 경험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방대한 지식,
빛나는 사유의 주인
보르헤스는 언어와 시간을 초월하여 상이해 보이는 여러 나라의 문화와 문학을 연결할 수 있는 천재였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었으며 영문학 교수였던 이력만으로도 짐작 가능하겠지만 보르헤스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이었죠. 스페인어,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구사했고 그 원어로 원서를 읽는 것을 즐겼습니다. 언어의 마술사답게 시를 사랑해 각 나라의 시와 그 구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광적인 수다를 이어가는 사람이었죠. 나아가 그 나라들의 문학을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아우르며 소화해 낸 문학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나 방대하고 복잡한 지식을 습득했을뿐더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천재’ 보르헤스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실수라고 생각하지요. 사람들이 나를 너무 부풀려 놓았어요. 나는 몹시 과대 평가된 작가예요.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중
하지만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을 만큼, 그의 이야기에는 문화와 언어, 시대와 장르를 뛰어넘는 갖가지 문헌의 인용과 오마주가 가득합니다. 마치 인류 지식을 모두 지닌 살아 있는 도서관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죠. 그런 보르헤스의 사상과 작품은 어떤 경험을 토대로 빚어졌을까요?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경이로운 아이러니
보르헤스는 익숙하게 굳어진 개념을 뒤흔들고 시공간의 설정은 무한으로 달려 나가도록 풀어놓는 세계관의 마술사 같은 작가입니다.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 구축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일은 바로 시력을 잃는 경험입니다. 보르헤스는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국립도서관 관장이었는데, 내가 글자가 없는 책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다음엔 내 친구들의 얼굴을 잃었어요. 이어 나는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 다음 모든 게 흐릿해졌고, 지금은 흰색과 회색만 겨우 알아볼 수 있어요. … 셰익스피어는 “맹인이 보는 암흑을 보며”라고 말했는데, 그가 잘못 안 거예요. 맹인은 암흑을 볼 수 없어요. 나는 희뿌연 빛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답니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보르헤스라는 위대한 지성인을 소개하는 데 굳이 시력의 상실을 가장 처음에 언급한 이유는 그의 장애 극복 서사를 특징 삼으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 경험이 보르헤스의 초현실적인 사상을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이죠. 눈이 멀어져 가는 경험을 생생히 담아낸 그의 시와 인터뷰는 새로운 세계로 기꺼이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의 심경 고백 같습니다. 얼핏 보면 절망스럽고 애처로워 보이지만, 보르헤스는 그 경험을 계기로 문학, 꿈, 시공간 등 보르헤스만의 세계를 상징하는 주제들을 완전히 재편성하며 사상의 확장을 이뤄냅니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창조자』 중 「축복의 시」
이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잃어버렸으니, 다른 것을 만들어야 해. 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해. 내가 정말로 잃어버린 가시적인 세상을 이어받을 미래를 말이야.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말하는 보르헤스』 중
이런 배경을 알고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난해하기만 했던 보르헤스의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과 한계를 초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쾌활하고 순수한 호기심을 느끼면서 말이죠. 시력 상실은 그의 경이로운 사상의 확장을 옭아매는 장애는커녕 보르헤스만의 신비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게 한 최고의 자산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과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르게 감각하게 된 보르헤스의 독창적인 세계는 시공간이라는 관념의 틀을 부수며 날개를 단 듯 훨훨 뻗어나갑니다. 그에게 시간은 더 이상 매 순간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보르헤스에게 ‘시간’이 중요한 주제이기에 간략히 짚고 넘어가보겠습니다. 그는 시간은 본질적인 단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하는 이 시간이라는 개념은 연속성의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대신 자아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나에게 묻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그게 뭔지 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물으면 나는 모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며, 보르헤스는 시간 개념에 엮인 이 자아가 곧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고 합니다. 자아가 어디,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따라 시간의 유효성이 변하기도 하죠. 그렇게 보르헤스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시간과 엮인 우리 자아에 대해 고찰하게 됩니다. 이런 설정은 보르헤스의 단편들 곳곳에 기본 전제로 깔려있습니다.
1) 『기억의 천재 푸네스』
보르헤스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을 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눈이 멀기 전에는 온갖 것들을 구경하고 보고 읽으며 피난처를 얻었다면, 지금은 생각 혹은 꿈이라는 행위와 친해져야 한다고 말이죠. 오랜 시간 고독과 친해지면서 자신을 그냥 놓아두고, 인생을 꿈처럼 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억 속에서 살아가면서요.
눈이 멀었다는 감각은 시인으로서 보르헤스의 사유를 섬세하게 세공합니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절대적으로 ‘기억’에 의존하게 되면서, 기억과 망각에 의해 상상력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포착해 그 상상력을 문학 세계의 원동력이자 본질로 삼아낸 것이죠.
기억이라는 소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보르헤스의 단편 중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보르헤스는 그 이야기를 불면증에 대한 은유로 썼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 했기 때문에 무한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미쳐버릴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이야기죠.
우리는 한눈에 탁자 위에 있는 세 개의 컵을 감지하지만, 푸네스는 포도 덩굴에 달린 모든 포도알과 포도 줄기, 그리고 덩굴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1882년 4월 30일 동틀 무렵 남쪽 하늘의 구름 모양을 알고 있었으며, 기억 속의 구름과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어느 책의 가죽 장정 줄무늬, 혹은 케브라초 전투 전야의 네그로강에서 어떤 노가 일으킨 물보라를 비교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시각적 이미지는 근육 감각이나 체온 감각 등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꿈이나 선잠을 자면서 본 모든 것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중 「기억의 천재 푸네스」
기억의 천재인 푸네스의 세계는 비옥했지만 상세한 것들,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세세한 것들만 존재했습니다. 푸네스는 어떤 물체를 분류할 때 한가지 속(屬)적 상징이 형태도 크기도 다른 개체들을 묶을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해합니다. 단적인 예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본 개가 3시 15분 정면에서 본 개와 동일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했죠. 포르투갈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어렵지 않게 배우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모두 지켜볼 수 있는 명민한 푸네스. 하지만 그는 정말 훌륭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작중 화자는 사고라는 것은 곧 차이점을 잊고,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라는 말로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이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기억하는 경험의 느낌을 상상해조차 해본 적 없을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아주 생생히 그 느낌을 묘사하고, 그런 사고의 가치까지도 판단해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고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독자를 밀어넣는 것 같습니다.
2) 『바벨의 도서관』
『바벨의 도서관』은 무한대의 개념을 다룹니다. 이 도서관은 인류 역사상 모든 지식을 일정한 규칙을 지닌 책으로 총망라해 갖고 있습니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 도서관에서 자신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고 우주의 근본적인 진리를 깨우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환호합니다. 각자 자신을 이 무한한 해결책의 주인이라 느끼며 행복감에 젖어 진리의 개론서 같은 책, 그 책을 반박해줄 변론서, 그에 대한 또 다른 변론서를 찾아 끝없이 도서관을 헤맵니다. 무한한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과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이해한 것이 맞겠지?’ 슬쩍 넘어가려는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날카롭게 질문하죠.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
사람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평생을 분투하며 삽니다. 그 이상과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싸움을 벌이면서 말이죠. 위대한 앎에 집착하며 일희일비하는 인간들의 생성과 소멸은 도서관의 영속성과 그 넓디넓은 공간을 밝히는 불빛에 일말의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새로운 철학 사조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를 지릅니다. 하지만 그건 한 페이지에 글 줄로 남을, 지나가는 일일 뿐입니다.
이전까지의 사상, 특히 서구 문명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기대어 우주의 진리를 인간의 지성으로 밝혀낼 수 있다 믿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는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세계는 수수께끼이기에 인간의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없는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비밀스런 구조’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합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지금까지 현상을 바라봐온 고정적인 사고를 해체하도록 부추기면서요.
도서관 이야기 뿐 아니라 보르헤스의 다른 작품들도 비슷합니다. ‘머리로 납득되지 않는’ 설정을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이죠. 서사가 없는 이야기들도 대부분일뿐더러 화자도 불분명합니다. 시공간 배경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시간, 공간의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진도가 나갈 수 없을 지경으로 뒤틀려있습니다. 선형적 사고를 완전히 깨뜨려야만 한 발 내디딜 수 있으나, 그 내디딘 걸음마저 내가 제대로 내디딘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다가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게 되죠. 불신과 회의로 가득한 이 독서 경험은 굳어진 채 살아온 우리의 사고를 뒤죽박죽 부수고 뒤섞어 해체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의 이야기가 지닌 위력입니다.
3)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17세기에 쓰여진 원작 돈키호테를 그대로 베껴쓰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피에르 메나르의 필사 작품은 돈키호테와 같은 작품일까요? 글자 상으로 똑같지만, 화자는 ‘피에로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말합니다.
이 궤변 같은 말은 무슨 뜻일까요? 보르헤스는 원작 돈키호테를 쓰던 세르반테스가 처한 시간과 상황, 피에르 메나르가 글을 베껴 쓰고 있는 상황과 그 행위의 주체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두 작품은 완전히 별개라고 말합니다. 한 대담에서, 보르헤스는 언어는 계속되지만 책은 잊힐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 그저 시대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다시 쓰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고요. 그저 시대에 따라 조금 달라지는 몇몇 상황만을 바꾸거나 덧붙이면서 말이죠. 그는 우리는 항상 고대인들이 썼던 것을 다시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작가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은 전통의 일부가 되는 것, 언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죠.
글자가 동일해도 다른 작품이라고 보는데, 아무렴 독자가 달라지면 어떨까요? 보르헤스는 창작과 글쓰기 행위뿐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를 통해 자신의 작품 또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르헤스 자신이 뭔가를 쓰면 그것은 각 독자에 의해 매번 바뀌고, 모든 새로운 경험은 책을 풍요롭게 한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책이란 것은 독자가 읽어줄 때, 기억해 줄 때만 존재한다는 아름다운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관점에서는 책, 작품이라는 것도 결코 한 가지 형태로 고정해서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마세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 자신의 존재 여부라던가 사고의 근원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증명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생각의 생각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비현실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을 때도 비슷합니다. 이해하려 드는 순간 사고가 멈춰버리죠. 보르헤스는 한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밝혀줍니다. “나는 그게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 체스, 무한대로 갈라지는 길, 지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미로의 복잡성. 굳이 어떤 사조로 엮어본다면 정설로 통하던 관념에 의문을 제시하고, 방대한 지식을 기호화하며, 보편타당한 문명의 합의점을 해체하는 보르헤스의 사상을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탈구조주의로 정의할 수 있겠지요. 현실에서 시작해 상상 속 가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설정은 환상 문학의 일종으로 일축할 수 있겠고요. 하지만 보르헤스의 시와 소설, 에세이를 읽고 나면 그의 세계를 그 무엇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우며,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인류가 정의해온 모든 사상의 집합체이거나 혹은 모든 사상에도 구애받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사상이라는 아이러니한 정의로 간신히 증언할 수 있을 듯합니다.
미셸 푸코는 보르헤스의 문장을 읽고 ‘내가 익숙하게 생각한 모든 사상의 지평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절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알고 있었던 공간, 시간, 언어, 우주에 대한 개념은 과연 유효한가 좌절하게 만드는 책. 통념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보르헤스의 세계입니다.
그러니 강조할 것은,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자기 지성의 틀 속에서 전부 이해했다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 채 책 속에서 조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음을 즐기세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념을 아무리 다르게 가져오더라도 얼마 못 가 직면하는 한계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앎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이야기의 뒤틀린 설정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고 방랑하며 사고를 풀어두는 것이 보르헤스의 세계를 즐기는 시작입니다.
여든 살, 인간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자신은 정치에도 돈에도 명예에도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 과거를 숭상한다면서요. 우리가 휴머니즘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우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린 그렇게 우리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려 손을 뻗으며, 우리 자신을 더 크게 확장하려 애를 씁니다. 보르헤스는 우리가 잘할 수 없다고, 그저 불완전하게만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죠. 우리에겐 70년이 넘는 인생이 주어지고, 한평생의 시간이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은 몹시 따분하니까요.
불완전하다고 말하면서도 보르헤스는 생동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그 순간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계적인 반복의 순간에는 뭔가를 느끼지도, 발견하지도 않으니까요.
보르헤스의 말에 따라 어느 하루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 하루에서도 많은 죽음과 많은 탄생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든 살의 보르헤스는 명랑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어 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호기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늘 경험을 받아들인다고요. 비록 자신의 행위와 말의 많은 부분이 기계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삶보다는 죽음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시로, 단편소설로, 우화로 바뀔 수 있도록 자유로이 놓아두면서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었기에 살아 움직이는 현실과 허구가 섞인 꿈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세계는 활자를 멍하게 따라가는 독자를 냉정하게 내칩니다. 많은 사고를 요구하죠. 그래서 보르헤스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주제와 그 주제를 만든 그의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강연록이나 인터뷰집은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보르헤스의 지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문학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증언이죠. 문학 속의 보르헤스와 현실의 보르헤스를 교차하며 만나는 동안 관념적이라 어렵게만 느껴진 보르헤스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든 살의 노작가가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소개합니다. 그는 죽음을 희망 가득한 것, 소멸의 희망으로 바라봅니다. 그 어떤 한계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보르헤스는 꿈 같이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해 낸 만큼 평생 꿈을 꾸듯 세상을 살다 간 것 같습니다. 그는 ‘나는 늘 낙원을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 그건 내가 늘 꿈을 꾸고 있었다는 뜻이지요.’라고, 쾌활하게 이야기합니다. 도서관을 하나의 우주로 비유했던 그의 사유를 따라, 보르헤스의 낙원에서 그의 무한히 자유로운 사유를 따라 지성의 확장을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마음산책, 2015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20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영원성의 역사』, 민음사, 2018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창조자』, 민음사, 2019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말하는 보르헤스』,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