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취향으로
계급을 나눌 수 있는가

취향의 수준을 논하는 사회
숨어 듣는 음악
Edited by

한때 음악을 들으며 걷는 사람을 붙잡고 “무슨 음악을 듣냐”며 묻는 영상 콘텐츠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당황한듯 이어폰 한쪽을 빼고, 스마트폰 화면 속 앨범 커버와 곡을 보여주고는 제 갈 길을 가는 행인.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그가 듣는 음악으로 우리는 이미지와 취향을 유추한다. 영상의 댓글을 확인해보면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반가운 댓글과 그의 취향을 판단하는 댓글이 공존하는 걸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과연 어떤 음악을 보여줘야 가장 나다우면서도, 좋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음악 취향에 좋고 나쁨이 있을까 싶었지만, 댓글 창에 형성된 담론으로 미뤄봤을 때 취향에 보이지 않는 ‘수준’ 혹은 ‘계급’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 취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미지 출처: unsplash

현관문을 나서면서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보는 일은 많은 이들의 루틴일 것이다. 이때 어떤 음악을 들을까 고민하다 선택하는 곡은 보통 고유의 음악 취향과 밀접할 확률이 높다. 오늘의 날씨와 맞는 분위기를 고려할 수는 있어도 무슨 음악이 본인에게 더 유익한지 판단하며 음악을 선택하기보단, 대부분 취향의 범주 내에서 고르기 마련이다. 중국 음식점에서 메뉴를 고민하다 짬뽕을 주문하는 건 고도의 효율성을 따져 도출한 결과가 아닌, 그저 오랫동안 혀와 두뇌에 축적된 입맛 취향에 따른 자연스러운 버릇인 것처럼 말이다.

음악 취향 역시 오랫동안 축적된 일종의 문화적 자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 짓기』를 통해 취향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비투스는 이성적 선택보단 본능적 행동이며 각종 경험과 관습이 빚어낸 버릇이자, 취향이다. 현대인의 음악 취향 역시 아비투스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어린 시절부터 접한 수많은 음악이 쌓여 굳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최근에 슈게이징 장르를 즐겼다는 이유로, 이를 음악 취향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르디외에 따르면 취향은 나와 타인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본인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취향이 필요하다는 것. 개인의 음악 취향은 그렇게 독립성을 확보하지만, 한편으론 비슷한 취향에 이끌려 집단을 형성하기도 한다.


공유와 독점이 공존하는
취향의 바운더리

이미지 출처: IMDb

“무슨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일종의 카드 게임이다. 각 플레이어의 카드 패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서로의 패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카드를 앞면으로 뒤집는 행위. 이때 각 취향이 극명히 갈린다면 게임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는 톰의 헤드폰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밴드 스미스의 음악을 엿듣는다. 그리고 스미스를 좋아하냐는 대화로 둘의 관계는 발전한다. 같은 음악 취향을 향유하는 것으로 개인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집단으로 확대된다. 비단 같은 음악을 듣는 연인뿐만 아니라 한 아이돌 그룹의 팬덤으로, 특정 장르를 애정하는 커뮤니티 문화로 결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음악 취향은 집단 내에서 ‘공유’된다. 취향은 나와 타인은 물론, 집단과 집단 사이를 구분 짓기도 하는데, 타 집단이 접근할 수 없도록 음악 취향을 ‘독점’하기에 이르기도 한다는 의미다.

17세기까지 클래식 음악은 왕실 권력에 의해 통제되었다. 일반 대중이 향유할 수 없도록 음악을 독점한 것이다. 이는 곧 왕실의 막강한 권위를 드러냈다. 비교적 음악 청취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는 어떨까.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사고는 19세기부터 제기되어 온 오래된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음악을 청취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선 라이브 클럽에서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걸치고 노래하는 록 밴드를 선망하는 취향을 본인들과 동일 선상의 수준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아끼던 뮤지션이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 될 만큼 유명해지면 더 이상 나만의 음악이 아니라는 것에 상실감을 느끼는 것 또한 본인의 집단에서 더 이상 독점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아닐까. 이처럼 같은 음악 취향으로 결합된 집단은 타 집단의 취향을 배척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데, 이는 곧 계급의 구분으로 발현된다.


음악에 계급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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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계급은 각자 자신들만의 문화를 통해 계급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문화적 우월이야말로 사회 공간에서 계급 간 위계를 결정짓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브루디외의 주장처럼 말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취미로 승마를 배우고 가족들과 오페라 공연을 즐기며 부모님의 와인 취향을 접한 아이들은 향후 고상한 음악 취향을 가질 확률이 높다. 이는 계급별로 향유하는 취향이 갈린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맞는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어나고 자라며 접한 각종 문화 예술적 체험이 천천히 축적되어 음악 취향으로 굳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취향은 철저히 계급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반면 프랑스 사회학자 앙투안 에니옹은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를 거부한다. 스트리밍 사이트의 인기 차트에서 히트곡을 골라 듣는 사람은 수동적이고 낮은 수준의 취향을, 현악 4중주와 합창단의 음악을 선호하는 사람은 높은 수준의 취향을 가졌다는 식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청취자는 그저 취향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경험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된다. 한편 에니옹은 특정 취향을 가진 음악 감상자를 ‘아마추어’라고 명명히는데, 아마추어는 음악을 청취하는 데 특정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좋아하는 분야를 마스터하려고도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자신의 음악 취향을 말하는 자리에서 아마추어는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 무엇이 자신을 열정적인 상태로 만드는지에 대해 설명할 뿐이다.


좋은 음악 취향에 대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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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취향을 얘기할 때 ‘숨듣명’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가 있다. 말 그대로 ‘숨어서 듣는 명곡’이라는 뜻으로, 대놓고 듣기 민망하지만 분명 계속해서 듣고 싶은 명곡이라는 걸 의미한다.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데 부끄러운 감정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남들에게 좋은 음악 취향이라며 소개하기 어렵거나, 수준이 낮은 취향이라 여기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좋은 음악 취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바로크 시대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는 것과 현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대중가요를 듣는 것,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마이너한 재생목록을 고수하는 것, 피치포크 등 음악 비평 사이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곡을 선택하는 것 중 좋은 취향은 무엇일까?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론에 입각한다면 ‘수준 높은’ 취향은 비교적 경제 자본과 사회 자본이 풍족한 계층이 향유하기 쉬운 클래식, 오페라 등의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취향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측면에서 취향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얼마만큼 객관성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마이너한 취향으로 가득한 재생목록 사이에 아이돌 그룹의 댄스 음악 하나가 추가되어 있을 때, 괜히 신경이 쓰여 삭제했던 경험이 있다. 취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가 아닌, 누군가에게 재생목록을 들켰을 때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좋아하는 명곡을 숨어서 듣는 건 암묵적으로 취향에 계급과 수준이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기준은 각자에게 달렸다. 필자가 삭제한 곡은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안착해 당당히 빛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보여지기 위해 꾸며낸 취향과 문화적 허영심을 경계하는 것이 수준이나 계급으로부터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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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

좋아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걸 조합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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