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 어떤 감정이 떠오르시나요? 이 단어만큼 설렘과 불안함을 고루 지닌 단어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불안함이 설렘을 앞설 때가 있죠. 시작이 반이라서 이렇게 처음이 어려운 걸까요? 무엇인가와의 어려운 첫 만남에 고전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살펴볼 만한 작가들의 첫 책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4321』과 『뉴욕 3부작』으로 잘 알려진 폴 오스터의 첫 책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바로 생활고의 압박이었습니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빵 굽는 타자기』에서 첫 소설책 『스퀴즈 플레이』의 탄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튿날 아침, 책상 앞에 앉아서 간밤에 생각한 소설을 써보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말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작품은커녕 제대로 된 음절 하나 쓰지 않았고, 일자리도 찾지 못했고, 예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은 탐정소설 한 편 써낼 수만 있다면, 은행 계좌에 하다못해 몇 달러 정도는 들어올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생존의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_『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폴 오스터는 이미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글쓰기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소설을 출판한다는 것은 안정적인 생존의 기회를 얻는 것이었죠.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하룻밤 만에 추리 소설의 뼈대를 완성하게 됩니다. ‘미스테리’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았던 폴 오스터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그럴듯하게 모방해 두 달 만에 첫 소설을 완성합니다. 번역가, 시인 또는 에세이스트가 아닌 ‘소설가’로서 폴 오스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첫 소설인만큼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폴 오스터는 첫 소설을 이렇게 회고하죠.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_『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는 탐정 소설로 메이저리그 스타플레이어 조지 채프먼이 의문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프먼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전직 변호사이자 사립 탐정인 맥스 클라인에게 찾아가게 됩니다. 기존 폴 오스터의 작품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문체가 약간은 투박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날 패기로 가득 찬 대가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죠. 기존 탐정 질서를 깬 신선한 추리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폴 오스터의 첫 책 『스퀴즈 플레이』를 권합니다.
“조지 채프먼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5월 둘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는 변호사인 브라이언 콘티니한테 내 이름을 들었다면서, 사건을 맡기고 싶은데 시간 여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_『스퀴즈 플레이』,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상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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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스티븐 킹
다작으로 잘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은 자신의 첫 책인 캐리를 집필할 무렵 세탁소에서 잡부로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영어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인 태비가 배려해 준 덕분에 셋집 현관이나 트레일러의 세탁실에서 소설을 집필할 수 있었죠.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스티븐 킹은 『캐리』를 집필하던 시절 ‘글 쓰는 일의 외로움’과 이를 믿어주는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글쓰기는 외로운 직업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_『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이 집필하던 소설의 주인공인 캐리 화이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초고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립니다. 『캐리』의 초고를 담배꽁초 사이에서 다시 발견한 아내 태비가 ‘이 소설에 무언가 있다’며 나머지 이야기를 써보라고 응원하자 킹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캐리’를 집필하며 스티븐 킹은 ‘쓰기 싫어도 쓰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달았다고 하죠.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좋은 작품이 되고 한다.”
_『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캐리』의 주인공인 캐리 화이트는 기독교 광신도의 딸로 집안에서 가정폭력을 겪는 고등학생입니다. 성을 혐오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이런 지식이 전혀 없던 캐리는 고등학생이 되어 초경을 겪고 각성하여 초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각성을 이후로 캐리는 모종의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몰입감에 스티븐 킹이 베스트 작가인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캐리는 네 개의 대형 샤워 칸 가운데 한쪽으로 뒷걸음치더니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 애의 입에서 절망에 찬 신음 소리가 느릿느릿 터져 나왔다 그 애의 눈은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의 눈처럼 축축한 흰자위를 내보였다.”
_『캐리』, 스티븐 킹
『교수』,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로 잘 알려진 샬럿 브론테의 첫 책은 사실 『교수』 라는 소설입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남자를 주인공으로 심리적인 갈등과 모호한 성 정체성을 치밀하게 묘사한 작품이죠. 산업 혁명 시절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남성을 묘사한 작품은 그 당시 남성이 주류이던 출판 업계를 매우 불편하게 했습니다. 결국 원고는 출판사들의 거부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사후에 출간됩니다.
책의 주인공인 윌리엄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가의 지원으로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의절하게 되죠. 영국에서의 인간관계가 지겨워진 윌리엄은 벨기에로 떠나게 됩니다. 뜻밖에 남자 기숙 학교의 영어 교사 자리를 얻은 그는 점점 그곳의 인간관계에도 환멸을 느낍니다. 그러다 프랜시스라는 자신과 비슷한 여성을 만나 끌림을 느끼게 되는데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허영을 쫓는 사회에서 환멸을 느끼는 건 똑같은 감정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이 자신의 세계와 관계를 이해하고 좌절하는 과정에서 묘한 공감을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기호는 환경에 의해 규제된다. 예술가는 풍경이 좋기 때문에 언덕이 있는 시골을 좋아한다. 기술자는 편리하므로 평평한 땅을 좋아한다. 쾌락을 좇는 사람은 <멋진 여자>를 좋아한다. 그런 여자가 그에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유행을 좆는 젊은 신사는 유행을 좇는 젊은 아가씨를 떠받든다. 유유상종인 법이므로, 일에 지치고 기진맥진해지고 신경질적일 수 있는 교사는, 아름다움에는 거의 눈이 멀고 뽐내는 것과 우아함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로 어떤 정신적인 특질을 자랑으로 여긴다.”
_『교수』, 샬럿 브론테
뛰어난 작가들도 제각기 다양한 시작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모두 쉽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공통점이죠. 시작을 앞두고 초조함이 든다면 조금은 처절하고 간절했으며 때로는 살짝 우울하기도 했던 작가들의 처음을 보며 용기 내보는 건 어떨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시작이 있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