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하는 뭉크와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간 예술가

예술은 때때로
깊은 절망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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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때때로 인간의 심연, 특히 우울이나 절망과 같은 불행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유명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희극보다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한 삶이 결과적으로 예술적 명성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적지 않죠. 그렇다면,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이 예술의 더 강력한 원천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절규’라는 단어를 아이콘화시킨 한 작품이 떠오릅니다. 누구보다 기구한 삶을 살았던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현재 예술의 전당에서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내면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될 텐데요. 그의 절규에는 어떤 예술적 힘이 존재했던 걸까요? 그리고, 그의 절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예술적 삶과 치유를 선사했다면, 절망이 가진 모순된 영향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절규는 무슨 색인가요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3, 골판지 위 오일 템페라 파스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3, 골판지 위 오일 템페라 파스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어릴 적 가족의 죽음과 아버지의 학대, 그리고 화가가 된 이후에는 나치의 탄압 등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을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예술적 주제에 깊은 영향을 주었죠. 특히,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피어난 작품, “절규(The Scream)”는 그의 내면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규”는 각기 다른 색감과 기법으로 제작된 여러 버전이 존재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회화 버전은 뭉크가 첫 번째로 제작한 1893년 작입니다. 이 작품의 모서리에는 “오직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다”는 친필 문구가 적힌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늘엔 붉은빛 노을 혹은 뭉크가 보았을 불안의 환영이 일렁입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이자, 곧 고통을 연상케 하는 색이죠. 마치 온몸에 피멍이 번져가는 듯한 그의 고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그는 일기를 통해 당시 느꼈던 내면적 불안과 공포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불타는 하늘이 검푸른 피오르와 도시 위에 피와 칼처럼 걸려 있었다”고요.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5, 석판화 채색, Reitan Family Collection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5, 석판화 채색, Reitan Family Collection

예술의 전당에서 볼 수 있는 “절규”는 1895년 작으로 석판화 버전입니다. 가장 유명한 회화 버전이 아니라 다소 실망감을 안고 돌아온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도난 사건 이후 작품 반출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 까닭에, 회화 버전을 보고 싶다면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가야 합니다. 그러나, 뭉크가 직접 손으로 채색한 단 두 점의 석판화 중 한 점이니 나름 희소가치가 높은 작품입니다. 하단에는 “나는 자연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비명을 느꼈다”라며 자신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장을 손 글씨로 적어두었습니다. 회화 버전에 비해 강렬한 색이 덜한 이 그림에서도 생생한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검은색과 흰색의 단순한 대비 덕분에 절규하는 인물의 모습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까맣고 날카로운 윤곽을 보면 어릴 적 뾰족한 판화칼로 엄지손가락 끝이 뻘게질 때까지 고무판을 긁어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물론 석판화는 요철이 아닌 물과 기름이 서로 밀어내는 작용에 의한 기법입니다만, 필자에게는 구불거리는 선들이 심연의 벽 어딘가를 긁어내는 듯 불편한 감정을 자극합니다. 붉은 하늘에는 아직 생명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검은색과 흰색만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세상은 대체 언제 어디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미궁처럼 느껴집니다. 절망의 순간에 다다라 울부짖고 싶을 때, 여러분의 세상은 무슨 색인가요?


예술의 전당,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 전시 페이지


뭉크에게 절망이란
삶의 그림자이자 예술의 원천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5–1886, 캔버스 유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5–1886, 캔버스 유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뭉크의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누이 역시 결핵으로 15세의 나이에 곁을 떠났습니다. 어린 뭉크가 누이의 죽음으로 인해 느낀 상실감은 그의 작품 “병든 아이(The Sick Child)”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 이후 우울증과 정신 분열 증상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종교에 심취하여 온종일 기도를 하고, 어린 자녀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다 너희들 잘못”이라며 죽음보다 더 한 심리적 고통을 가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겪어 온 고통과 불안, 절망과 외로움은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동시에, 그의 예술적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5, 골판지 위 파스텔, 개인소장
에드바르 뭉크, “절규(The Scream)”, 1895, 골판지 위 파스텔, 개인소장

대체로 기쁨과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우울이나 절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예술의 더 강력한 원천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정적 감정이 긍정적 감정보다 창작 과정에서 훨씬 더 강렬하고 감정적으로 깊은 몰입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우리의 생존에 더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정적 감정을 통해 위협을 빠르게 인지하고 대응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뼈를 깎는 고통’, ‘살을 에는 슬픔’처럼 부정적 감정에는 유난히 과격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이 통증이 실제로 지금 내 몸에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세요. 죽음을 각성시키는 이 상상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어질 겁니다. 이렇듯 우리는 생존을 위해 행복보다 고통을 더 강렬하게 인식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뭉크의 그림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의 절규는 희망 없는 외침이 아닌 고통에서 벗어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뭉크의 절규 속으로
뛰어 들어간 예술가,
트레이시 에민

트레이시 에민, “에드바르 뭉크와 나의 모든 죽은 자식들에 대한 헌사”, 1998, 비디오, Sammlung Goetz
트레이시 에민, “에드바르 뭉크와 나의 모든 죽은 자식들에 대한 헌사”, 1998, 비디오, Sammlung Goetz

뭉크의 절규가 치유의 원동력이 되어, 그의 절규 속으로 뛰어 들어간 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이라는 영국의 현대미술가입니다. 뭉크와 에민, 두 작가는 모두 자신의 개인적 고통과 상처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민은 13살 때 성폭행을 당했으며, 낙태와 유산이라는 상실의 아픔을 두차례나 경험했습니다.

그는 뭉크의 시골집이 있는 오슬로 피오르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른 새벽, 작은 부둣가에 걸어가 누웠습니다. 해가 뜨자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울부짖는 자신의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약 1분 동안 뭉크의 절규와 자신의 고통을 끌어 안았습니다. 이 작품에 “에드바르 뭉크와 나의 모든 죽은 자식들에 대한 헌사(Homage to Edvard Munch and All My Dead Children)”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당시 유산을 겪은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태껏 제대로 비명을 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뭉크의 절규를 끌어안고, 온전히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던 그 순간은 자신의 상실감을 치유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트레이시 에민, “나는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어 - 당신이 나를 이렇게 느끼게 만들었어”, 2018, 캔버스 아크릴, 작가 소장
트레이시 에민, “나는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어 – 당신이 나를 이렇게 느끼게 만들었어”, 2018, 캔버스 아크릴, 작가 소장

그는 감정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는 뭉크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했습니다. 에민은 자서전에서 “절규”를 처음 본 경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끊임없이 자기고백적인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직설적으로 표현했죠. “나는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어(I Never Asked to Fall in Love)”라는 작품에서도 그의 내면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피처럼 붉은 바다 속에 한 여성이 풍덩 잠겨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용감하게 절망과 고통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술을 통해서 말이죠. 절망에 잠식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행위였던 것 같습니다.


트레이시 에민 영상작품 감상 페이지


프랑스 미술학교를 졸업한 지인으로부터 학교에서 진행했던 한 수업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다고 합니다. 캔버스는 절규의 소리로 가득 차며, 그림의 주체인 나는 곧 무아지경에 빠지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짜릿함과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예술이란 결국 ‘고통을 게워 낸 일종의 토사물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가란 자신의 토사물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붙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까지 예술이 매개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예술의 경이로움에 대해 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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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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