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무수한 시작이 존재합니다. 어떤 시작은 보는 이들에게 설렘을, 어떤 시작은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모든 시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작은 한계를 뛰어넘고, 가로막힌 벽을 뚫는 고단하고 지루한 순간을 견뎌야만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돌아서는 대신, 그 ‘벽’을 뚫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어떤 ‘시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도 잘할 수 있어요
여자가 운전을 하면 호기심에라도 타보겠지, 생각했었지요
어릴 때 필자의 어머니는 커다란 봉고를 끌고 다니셨습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운전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운전하는 게 흔치 않다고 생각하던 시대여서인지, 아니면 몸집보다 큰 차를 끌었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가끔씩 “여자가 무슨 ‘그런 차’를 타냐”는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 차’를 타냐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또 있습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택시기사 이정옥입니다.
“자동차부 앞을 지날 때마다 여자가 자동차 운전을 한다면 호기심에 끌려서라도 한번씩은 타볼 게다,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_1930년 대중잡지 <별건곤> 6월호
2024년 현재도 여성 택시 기사는 남성 택시 기사에 비해 현저히 적습니다. 1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요? 하지만 그런 현실쯤은 이정옥의 열망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자동차부를 지날 때마다 ‘여자가 운전을 한다면 호기심에라도 타보고 싶을 것이다’ 생각했다는 이정옥은 남자들과 섞여 면허를 취득한 뒤, 한국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가 됩니다. 이정옥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정옥은 자신의 집을 담보로 크라이슬러 차 2대를 구입한 뒤 ‘대양자동차부’라는 택시 회사를 설립하는데, “남의 자동차부에 취직하기 싫어 내가 자동차부를 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창이던 1929년. 일본 남성 노동자가 2.32엔을 받을 때 조선 남성 노동자들은 1엔을,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은 0.59엔을 임금으로 받았습니다. 조선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중 차별을 겪으며 저임금에 시달린 것입니다. 여성들의 평균 임금이 겨우 몇십 원에 지나지 않던 시절, 이정옥은 한 달에 600원에서 1,000원의 수입을 올리는 CEO로도 대성공을 거둡니다. “여자가 운전을 하냐”는 무시와 희롱에도 당당히 운전을 시작했던 덕분에 말입니다.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부터 <신여성>의 유일한 여성 기자로 채용된 송계월, 조선 최초의 미용사였던 오엽주까지. 자신의 ‘경제적 독립’의 토대를 쌓기 위해 노력했던 100년 전 여성들의 시작의 순간들은 다큐프라임 <직업 부인 순례>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여성백년사 –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2부 – 직업 부인 순례> 상세페이지
‘아줌마’ 대신 ‘용접사님’이라고 불러줘요
남성 노동자가 대부분인 건설업은 오래도록 ‘남자들의 일터’로 불려 왔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편견을 깨고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여성들이 있습니다.
베테랑 배관 용접공 김신혜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대기업 석유화학 공장부터 부동산의 경리 직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는 김신혜 씨는 40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용접을 배워, 충남권에서 여성 최초로 배관 용접을 시작했습니다.
‘용접사 김신혜’의 시작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을 때마다 “여자가 무슨 용접이냐” 면박을 당했고, 일하는 동안에도 많은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신혜 씨는 10년간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이제는 현장에서 믿고 찾는 용접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님’을 붙여줘요. ‘김신혜 씨’, ‘아줌마’가 아니라 ‘용접사님’이라고 불러줘요.”
_<다큐 잇it – 엄마는 용감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해야 하고, 현장은 위험천만합니다. 아파트 17층 높이와 맞먹는 아찔한 공중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용접을 진행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어 보이지만 ‘용접사 김신혜’는 “일어나 현장에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수많은 편견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1인분’을 해내고 있는 여성들의 시작은<다큐 잇it – 엄마는 용감했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죠, 그래서 제가 시작했어요
높고 큰 ‘추레라(25톤짜리 화물차를 이르는 말)’ 앞에 선 김지나 씨는 과거에 ‘전업 주부’였습니다. 한 번도 일을 해보지 않았던 김지나 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2016년 일자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화물차 운전을 선택했습니다. 운전 기술이 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김지나 씨는 ‘트럭커’로의 삶을 시작합니다. 초보 트럭커나 자신의 화물차가 없는 이들은 고용 기사로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지나 씨는 여성이니 화물차 조작에 미숙할 것이라는 편견과 임금차별 등의 문제로 일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김지나 씨는 좌절하는 대신 자신만의 ‘추레라’, 자신의 일터를 직접 마련하며 현실이라는 벽을 깨부숩니다. 어느새 베테랑 트럭커가 된 김지나 씨는 화물연대 최초의 여성 지부장에 당선되며 동료들에게도 인정받는 트럭커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가지 않던 길을 개척한 사람도 있습니다. 주택 수리 서비스 라이커스'(LIKE-US)’를 운영하고 있는 안형선 씨입니다. 안형선 씨는 강남역 살인사건, 신림동 주거침입 사건 등의 문제를 목격하며 여성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미션을 갖게 됩니다. 이후 1인 가구 여성들이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주택 수리 서비스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여성 기술자들로 꾸려진 주택 수리 서비스 기업 라이커스를 창업합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이 ‘0명’이라 자신이 시작했다 말하는 안형선 씨는 라이커스를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칭합니다.
전에는 가지 않았던 길, 혹은 누구도 하지 않던 길을 가는 ‘힘 좀 쓰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책 『나, 블루칼라 여자』에 담겨있습니다. 프롤로그에 적힌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이 건네는 삶의 용기’라는 부제처럼, 자신의 일터와 기술, 그리고 일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못다 한 이야기는 책을 통해 만나보세요.
50대에 다시 인턴이 되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00살인데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라는 고민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묻는 이들의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늦은 나이’에 대한 걱정은 모두 같습니다. 나이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면, 50대에 다시 ‘인턴’이 된 현창홍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은행에서 30년 이상 근무를 한 현창홍 씨는 부지점장으로 은퇴했습니다. 퇴직 당시 받은 감사패에 적힌 말처럼 자신의 청춘과 열정을 은행에 바쳤습니다. 현창홍 씨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자격증을 준비하고 50통이 넘는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새로운 시작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0대 여성은 마감됐다”는 거절을 숱하게 들어야 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당시 14일 차 인턴이었던 현창홍 씨는 다시 ‘막내’가 된 것에 대해 “어떤 어려움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창홍 씨와 같은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다시 일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와 일하는 즐거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할 의지와 능력이 충분한데도, 자신을 위한 일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 <50대 여성은 마감됐습니다>는 50대 이상 여성들이 처한 녹록지 않은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하지만 기억이 남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웃는 모습입니다.
<다큐 잇it – 50대 여성은 마감됐습니다> 시청하기
가끔 앞길이 막막할 때마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습니다. 그럼, 거짓말처럼 뒤따를 용기가 생겨납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삶과 시작은 또 다른 이의 용기와 시작이 됩니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에 도전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 한국일보, “분내 풍기지 말고 집에나 가라!”… 여성택시기사, 희로애락 100년의 이야기(2024.03.02)
- 프레시안, 건설·플랜트·운송…’남초 현장’에서 일하는 ‘베테랑 여성’ 이야기(2024.03.30)
- 프레시안, “여성 주택 수리 기사, 정말 ‘0명’이라 제가 시작했습니다”(202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