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른다는 착각

음악에 새겨진
시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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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절대적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일방향적 선형성을 내재한다. 시간은 작년에서 올해를 지나 내년으로, 어제와 오늘, 다시 내일로 흐른다. 그렇지만 시간이 이렇듯 선형적으로 흐른다는 사고는 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간에 관한 관념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작동된다는 것인지가 짐작도 잘 되지 않는다. 시간에 관한 우리의 사고는 언제, 어떤 계기로 확립된 걸까.

이 글은 시간이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재고해 본다. 시간의 물리적인 속성을 과학적으로 살피고 분석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을 근대성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보고, 그것이 시간과 함께 펼쳐지는 ‘음악’에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근대성

근대적 시간에 관해 이야기 하려면, ‘근대성’이라고 하는 좀 까다로운, 그렇지만 중요한 개념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이 복잡한 개념을 복합적으로, 그러면서도 충분히 깊이 있게 다루기는 어렵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다는 그럴 듯한 구실도 있지만,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살피려는 시간과 음악이라는 주제가 궁극적으로는 근대성에 관한 문제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 간략하게라도 짚어야 한다.

과도하게 축약하는 면이 있지만, 근대성을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데서 발현된 효율적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고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역시 지나치게 추상화 하는 면이 있지만, 근대적 사고방식이란 사물이나 현상, 때로는 인간과 자연까지도 수량화, 계량화하고 표준화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관심과 가깝다.

예컨대 지도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대표적 예다.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던 영토는 체계적으로 구획화 되어 정밀하게 측량할 수 있는 사물, 곧 지도가 된다. 지형이나 거리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면서 영토는 관리가 용이해진다. 영토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어 있는 숫자, 주민등록번호 또한 근대적 사고가 드러나는 또 다른 예다.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기 어려운 개인들에게 고유한 번호를 부여함으로써 인구는 조직적으로 관리된다. 때가 되면 국가로부터 날아오는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나 ‘징집소집통지서’ 같은 것 역시 개인이 숫자로 환원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다.

그리스 아테네
그리스 아테네. 이미지 출처: arch daily
프랑스 파리
프랑스 파리. 이미지 출처: arch daily

이 같은 수량화는 표준화와 자석처럼 달라 붙는다. 지도는 계획적인 지역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이는 근대 사회에 도시의 탄생을 알렸다. 넓은 도로와 일정하게 뻗은 거리, 높은 건물과 편리하게 설계된 대중교통. 세계 어느 나라든 고도로 발전된 도시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을 처음 제안한 캐나다 작곡가 머레이 셰이퍼가 『사운드 스케이프: 세계의 조율』에서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 역시 도시의 표준화 문제다. 다만 셰이퍼는 이를 소리의 문제로 고민한 경우다. 그는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문맥을 가진 전 세계 도시의 소리들, 곧 사운드스케이프가 얼마나 표준화되어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각 지역의 고유한 개성을 잃은 소리들로 꽉 차 있는지를 꼬집는다.


시계와 근대적 시간

같은 맥락에서 근대의 시계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시간’의 문제에서 작동된 경우다. 시계야말로 ‘계량화’하기 위한 대표적 수단이다. 시계가 계량하려는 것은 물론 시간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측정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은 시간을 정량적으로 계량하는 일이 때로 거칠고 난폭하기까지 한 ‘자연’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한 인간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해시계, 물시계 같은 고대의 원시적 시계는 자연의 리듬, 반복, 주기 같은 것들을 측정하는 데 활용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인류는 자연을 예측하고 대비하며 나아가서는 유리하게 이용도 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18세기 무렵, 진자의 주기적인 운동을 시계 작동 원리에 도입하면서 발명된 기계식 시계는 대략적으로만 구분되던 시간을 보다 정밀하고 정확하게 측정하도록 도왔다. 이 같은 근대의 기계식 시계는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촉구했다. 이는 물론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이 가능하게 한 대량생산 시스템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더 빨리,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산업화 시대의 중요한 생산 가치였다는 점을 생각해면, 제한된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 ‘시간 없으니 요점만 말해라’ 같은 말은 실체가 없는 시간을 물질화하는 한편 시간이란 계속해서 착실하게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내재한다. 200여 년이나 흘렀지만 시간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년 우리나라의 소비트렌드를 전망하는 『트렌드 코리아』 올해 전망에서는 점점 더 촘촘하게 시간을 관리하려는 현대사회를 ‘분초사회’라는 개념으로 소개한다. 시간과 효율에 관한 태도만 놓고 보면 우리는 탈근대는 커녕 근대 사회의 극단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Canva ‘Magic Media’에서 생성
이미지 출처: Canva ‘Magic Media’에서 생성

이렇듯 점점 더 정밀하고 촘촘하게 발전된 시계와 함께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는 시간 관념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 또한, 시간은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방향,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서만 흐른다는 생각도. 요컨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바꿔 말하면, 시간은 흐르기만 할 뿐 정지할 수 없다. 또한 시간은 흐르되, 오로지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서만 흐른다. 역방향이나 다방향은 불가능하다. “‘지난’ 1년 동안의 고된 노력의 시간이 ‘오늘’의 커다란 성취를 가져다 주었고, 이 성취감은 ‘10년 뒤’에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될 거야”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들린다면,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관념에 익숙해서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원칙

살펴본 것처럼, 근대성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나 움직임이라기 보다 ‘사고방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대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하고, 계량하고, 도식화하고, 조직화하여 그것을 의도에 따라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는 관심. 근대성의 근본적인 욕망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성 체계(tonal system)는 서양예술음악 역사에서 발견되는 여러 근대적 계기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조성 체계가 어떻게 근대적 사고와 만나는지 이해하려면 조성 체계의 원리를 간단하게라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성이 이론적으로 확립된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물론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음악에서 사용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다. 다만, 그것이 하나의 원칙으로 체계화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조성 체계가 이론화 되기 이전, 서양음악은 ‘선법 체계’(modal system)를 사용하고 있었다. ‘선법’의 영어 ‘mode’는 고유한 ‘방식’이나 ‘상태’, ‘양상’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열공모드’의 바로 그 모드다. 각 선법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특수성을 갖는다. 어떤 선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음악에는 그 선법의 특수한 모드가 담겼다.

선법에서 조성으로의 이행은 각각의 선법 음계들이 가진 특수성을 덜어내고 음계의 보편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조성 체계는 장조와 단조 두 개 유형의 음계로 만들어진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피아노 건반에서 검정 색 건반이 비어 있는 ‘미-파’와 ‘시-도’가 반음 관계, 나머지 음들이 온음 관계라고 할 때 장조 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는 반음 관계가 세 번째-네 번째 음, 일곱 번째-여덟 번째 음에서 만들어진다면, 단조 음계인 ‘라시도레미파솔라’에서는 반음 관계가 두 번째-세 번째 음, 다섯 번째-여섯 번째 음에서 생겨난다. 조성 체계의 장조와 단조가 만들어지는 원칙은 이렇듯 ‘반음’이 음계의 몇 번째 음에 나타나는가와 관계 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악보와 피아노 건반
‘도레미파솔라시도’ 악보와 피아노 건반. 이미지 출처: Simplifying Theory

반음의 위치가 규칙화되면, 이제는 ‘레’에서 시작하는 장조, ‘미’에서 시작하는 장조, ‘파’에서 시작하는 장조와 같은, 모든 음들에서 시작하는 장조와 단조를 만들 수 있다. 가령 ‘레’에서 시작하는 장조는 ‘레미파#솔라시도#레’와 같이, 파와 도에 올림표를 새겨서 세 번째-네번째, 일곱 번째-여덟 번째에 반음을 만들어 주면 된다. ‘레’에서 시작하는 단조는 ‘레미파솔라시♭도레’와 같이, 시에 내림표를 새겨서 두 번째-세 번째, 다섯 번째-여섯 번째에 반음을 만들어 주면 된다. 이렇듯 조성 체계에서 장조와 단조는 어떤 음에서 시작하든 일률적인 음들의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원칙은 각각의 선법이 갖던 모드의 특수성을 도려내는 한편, 조성 음악의 세계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시’에서 ‘도’로

조성 체계가 근대적 사고방식이 발휘된 음악적 예라면, 조성으로 만들어진 음악에는 근대적 시간관이 각인된다. 유럽에서 근대화가 본격화 된 시기에 이론화 된 조성 체계가 근대적 시간, 곧 일방향적 흐름을 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조성 체계가 선형적 흐름을 가진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다시 장조와 단조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앞에서 장조와 단조 음계를 만들어내는 원칙은 반음이 어디에 놓이는가와 관련 있다고 했다. 장단조 체계의 음계에서 반음의 위치가 어디에 나타나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만족스러운 음악적 종결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역할’이다. 조성음악에서 각각의 음들은 고유한 역할, 곧 ‘기능’을 수행한다. ‘도미솔’ ‘솔시레’와 같은 조성음악에서의 3화음을 ‘기능화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게다가 이 3화음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기능을 하는 화음들로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화음 세 가지 으뜸화음(도미솔), 딸림화음(솔시레), 버금딸림화음(파라도)을 주요3화음이라고 부른다.

‘도’에서 시작하는 다장조 음계에서 만들어진 3화음들. 로마숫자 대문자로 쓰인 화음이 주요3화음이다.
‘도’에서 시작하는 다장조 음계에서 만들어진 3화음들. 로마숫자 대문자로 쓰인 화음이 주요3화음이다. 이미지 출처: Siomon Crome, Mixing A Band

주요3화음, 그중에서도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은 음악을 ‘시작’하고 ‘종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화음들이다. 음악은 으뜸화음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그러나 이 으뜸화음들 사이에 딸림화음이 오지 않는다면 음악은 결코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원리는 간단하다. 이는 장단조 음계의 구성원리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반음들과 관계 있다. 장조 음계에서 세 번째-네 번째에 오는 미-파, 일곱 번째-여덟 번째에 오는 시-도 반음 관계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에게 이끌리는 성질을 갖는다. ‘도레미파솔라시-‘까지만 소리내 보거나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까지만 노래 부르다 멈추어 보라. 무언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찜찜하다면, 그것은 ‘시’가 ‘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시’는 ‘도’로 이끌리는 성격을 갖는다. ‘시’ 음의 별명이 ‘이끔음’이라는 사실은 이 같은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시’ 음을 가진 화음이 딸림화음이다. 딸림화음의 ‘시’가 으뜸화음의 ‘도’로 이끌릴 때 비로소 음악은 목적지에 도착해 종결한다.

이처럼 ‘도미솔’에서 시작해 ‘솔시레’에 이르고 마침내 ‘도미솔’로 종결되는 화음들의 일정한 흐름은 음악의 미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거시적인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 화음들의 선형적 진행은 ‘학교종’ 같이 단순한 선율만이 아니라, 30분이 넘는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한 시간 가량 길게 지속되는 말러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기능화성에 의한 조성음악이라면, 확장된 형태의 ‘으뜸화음-딸림화음-으뜸화음’의 흐름을 갖는다. 길고 긴 음악일수록 ‘도’로 이끌리려는 ‘시’(딸림화음)는 극단적으로 강조된다. ‘도’ 음으로의 이행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면서 얻게 되는 효과는 극도의 긴장감과 압도적인 절정(climax)이다. 그리고 이 긴장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이후 맞이하게 되는 ‘도’에서의 해결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의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음악이 시작하고, 전개되면서 갈등과 긴장을 거쳐 해소된다는 일련의 흐름은 ‘기승전결’이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이야기의 형식을 닮아 있다. 조성음악에는 이렇듯 서서히 축적되는 음악의 요소들이 절정이라는 목적을 향해 흐르는, 선형적이면서도 목적론적인 시간이 각인된다.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까다로운 근대성의 문제를 시간과 음악의 경우로 살피려한 이 글의 도전이 얼마나 달성되었을지 걱정도 앞선다. 멀리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이 글에서 하려던 말은 ‘시간은 흐른다’고 하는 절대적인 시간 관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내게 가장 익숙한 음악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내게 가장 익숙한’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함께 펼쳐지는 음악 예술이 시간에 관한 관념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사실은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각인된 습관이나 사고방식이, 그것이 본래적인 것이든 문맥에 따라 구성된 것이든, 우리가 향유하고 만드는 것들 곳곳에 스미고야 만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근대적 시간관이 나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볼 만하다.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특정한 방향으로 모이는 생각과 관념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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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인

음악과 음악활동을 하는
우리에 관해 생각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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