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바니타스를 통해
되묻는 삶의 의미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시지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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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나요? 우리가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은 더 선명해지곤 하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정물화의 한 장르인 ‘바니타스(Vanitas)’가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공허함’을 의미합니다. 고전적인 바니타스 작품에서는 주로 해골, 시든 꽃, 썩은 과일, 모래시계, 꺼진 촛불 등이 등장하는데요. 존재하는 한 영원할 수 없다는 삶의 유한함과 공허함을 통해 우리는 결국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또다시 시들어버릴 사랑을 찾고 있나요? 하루하루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나요? 삶의 의미를 물으면 물을수록 더욱 모호한 대답만이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실마리를 던져 줄지도 모르는 20세기 이후 바니타스 작품들을 감상하며, 소멸과 끝을 향해 흘러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 보려 합니다.


아름다움은
영원의 한 조각이라서

Anya Gallaccio, “Preserve ‘beauty’”, 1991–2003
Anya Gallaccio, “Preserve ‘beauty’”, 1991–2003, 이미지 출처: Tate.org.uk

허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아름다움이란 너무나 순간적이고 강렬해 우리를 절망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찰나의 황홀함에 현혹되어,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갈망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요. 아냐 갈라치오(Anya Gallaccio)는 인간의 이 헛된 욕망을 통찰합니다. “아름다움을 보존하다 (Preserve Beauty)”는 작품의 제목처럼 불가능한 시도를 하지만 이와는 상반된 결과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500개의 붉은 거베라꽃을 유리판과 전시장 벽 사이에 격자 형태로 배열했습니다. 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패합니다. 관람객들은 처음에는 생기 있고 화려한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합니다. 꽃들은 시들고, 곰팡이가 피며, 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처음 모습 그대로 멈춰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지요.

Anya Gallaccio, “Preserve ‘beauty’”, 1991–2003
Anya Gallaccio, “Preserve ‘beauty’”, 1991–2003, 이미지 출처: Tate.org.uk

이것이 아름다움이 지닌 잔인한 이면입니다. 사랑도, 젊음도, 어떠한 아름다운 시절도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영원해지길 바라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기어코 끄집어내고 말죠. 필자는 전시장에 걸린 이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면, 꽃이 가장 붉고 싱그러운 첫날이 아닌 시들고 부패하여 교체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모든 생명은 소멸로써 삶이 완성되기 때문이죠. 한때는 아름다웠고, 향기로웠고,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 있던 시절을 모두 지나온 가장 완전한 상태에 답이 있지는 않을까요?

설령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허무나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피었다가 시드는 꽃이 아니라 저 꽃을 바라보는 관찰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꽃 같은 사랑이 사그라들지라도, 당신은 그 소멸된 불꽃이 아니라 다시 불을 피울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기억해 보세요.


작품 정보 페이지


그러나 우리도 결국
사라질 거예요

로만 오팔카, “1965 / 1 – ∞” 시리즈 “1-35327”중 일부, 1965, 캔버스에 아크릴, Museum Sztuki, 폴란드
로만 오팔카, “1965 / 1 – ∞” 시리즈 “1-35327”중 일부, 1965, 캔버스에 아크릴, Museum Sztuki, 폴란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출근과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할 테고요. 혼자만 보기 위해 쓰는 일기도 사실은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오늘의 증명이 끝나면, 내일 또 다른 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 이 고단한 증명의 연속은 언제 끝이 날까요? 그 끝에는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로만 오팔카(Roman Opalka)는 캔버스에 1부터 시작해 순서대로 숫자를 적어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각 캔버스가 가득 찰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했으며, 한 캔버스가 다 채워지면 중단 없이 다음 캔버스로 이어갔습니다. “1965 / 1-∞”라는 프로젝트입니다. ‘1965’는 오팔카가 카운트를 시작한 해를, ‘1-∞’는 1로 시작해 정의할 수 없는 끝을 의미합니다. 그의 목표는 무한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패는 시작부터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어차피 무한에 도달할 수 없으니, 죽기 전까지 최대한 높은 숫자를 그리는 것이 최선일까요?

로만 오팔카, “1965 / 1 – ∞” 시리즈 “407817 - 434714”중 일부, 1965, 캔버스에 아크릴, Museum Sztuki, 폴란드
로만 오팔카, “1965 / 1 – ∞” 시리즈 “407817 – 434714”중 일부, 1965, 캔버스에 아크릴, Museum Sztuki, 폴란드

점진적으로 높아지는 오팔카의 숫자들은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을 향해 사라져가는 것일까요? 첫 번째 캔버스의 배경은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그는 이 검은색에 흰색을 1%씩 추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색은 점차 회색으로 변하다가, 2008년에는 완전히 흰색에 도달했습니다. 흰 물감으로 그려진 숫자들은 매우 희미해지기 시작했죠.

작가가 사망한 해인 2011년, 그의 숫자는 5,607,249에서 멈췄습니다. 다음 숫자인 5,607,250은 삶의 경계선 밖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숫자가 되었습니다. 5,607,249는 가장 희미한 숫자였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가장 선명한 숫자이기도 합니다. 오팔카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마지막의 가장 높은 단 하나의 숫자가 아닌, 5,607,249번의 숫자를 써 내려가며 살아있었던 매 순간들이라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WEBSITE : 로만 오팔카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After nightfall, Roundhouse, 2009, 이미지출처: longplayer.org

인간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관측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나이를 1,000년으로 압축하고 우리가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해봅니다. 그중 우리의 삶은 약 0.0026일, 그러니까 3분 42초 정도입니다. 우리는 방대한 우주 속에 태어나 4분도 채 되지 않는 삶이라는 노래 한 곡을 남기고 간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젬 파이너(Jem Finer)의 “Longplayer”는 1,000년 동안 지속되는 장기 음악 프로젝트입니다. 이 음악은 1999년 12월 31일 자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999년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마디도 반복되지 않을 예정입니다. 컴퓨터로 재생되는 싱잉볼 연주는 알고리즘 악보에 따라 정확히 1,000년을 주기로 반복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6개의 음악이 동시에 재생되고 결합되지만, 1,000년에 단 한 번만 제 자리로 정렬됩니다. 행성들의 궤도가 잠시 교차하고 멀어지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태양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1,000년 연주를 위한 (잘못된) 첫 번째 계산, 1995
1,000년 연주를 위한 (잘못된) 첫 번째 계산, 1995, 이미지출처: longplayer.org

음악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경험으로는 그 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우주의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1,000년이란 시간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무한에 가까운 긴 시간이니까요. “Longplayer”는 처음과 끝이 이미 결정되어 있어 마치 운명론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계산된 악보에 따른 연주임에도, 조합을 직접 듣기 전까지 어떤 소리일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처럼, 끝은 있지만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는 봉인된 결말을 향해 흘러가고 있죠. 1,000년 혹은 우주의 시간이 얼마나 광대한지 가늠하는 것도, 그에 비해 몹시도 미미한 우리의 삶을 허무에 빠뜨리는 것도, 끝을 예상하는 것도 모두 덧없는 시도입니다. 바로 이 프로젝트가 필자에게 바니타스로 다가온 이유입니다. 그저 내가 현재 들을 수 있는 몇 마디의 변주를 감각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감상일 것입니다.

“Longplayer” 연주는 웹사이트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실시간 스트리밍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전문 연주자들이 직접 연주하는 라이브 공연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라이브 공연은 1,000년 동안 지속되도록 설계된 악보의 일부분과 정확하게 동기화됩니다. 마치 영원의 한 조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할까요?


WEBSITE : Longplayer


시지프는 신들로부터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항상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이 끊임없는 반복은 명백히 무의미한 행위이지만,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운명을 ‘부조리한 영웅’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 쉽게 답을 주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의 모순에 저항하는 영웅을 뜻합니다.

의미를 찾기 전까지 우리의 삶은 무의미할까요? 카뮈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그 운명의 주체가 되어,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비록 삶이 죽음으로 끝나더라도, 그 순간의 감각과 경험에 집중하면, 바로 그곳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위 세 점의 작품 및 프로젝트는 이미 소멸과 끝이 정해져 있지만, 그 결말보다는 지속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게 합니다. 마치 이 시대의 모든 시지프들에게 건네는 질문이자 성찰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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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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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크리에이터 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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