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상업영화의 러닝타임은 대체로 2시간이라는 인식이 있다. 관객은 2시간을 기준으로 영화 상영 길이가 길거나 짧다고 판단한다. 너무 당연해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영화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장장 4시간을 견뎌야 하는 작품 예매를 고민한다면 문득 궁금해질 것이다. 보편적으로 영화는 왜 2시간이 됐을까?
할리우드의 패권
‘표준의 정착’에는 영화 산업적 측면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20세기 초반 이후 30여년간 영화 러닝타임은 15분에서 최대 10시간까지 천차만별. 필름 한 롤의 길이인 15분 내외로 시작된 영화는 필름을 이어 붙일 수 있는 기술 발전에 따라 점차 한계 없이 전개된다. 1930년대에 이르러 영화 흐름의 패권을 쥐게 된 할리우드가 오락성과 수익성을 극대화할 상영시간을 90분 정도로 생각하며 기준을 세워갔다. 이런 경향은 현재까지도 최적의 상영시간대와 수지타산을 맞출 회전율을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기에 구성적 관점이 따라붙었다. 보편적 상영시간에 대한 합의는 영화 산업의 필요와 관습에 의해 일정한 양식을 지닌 시나리오가 통용된 산물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 작성되는 상업영화 시나리오의 대부분은 1페이지를 보통 1분으로 계산하며 한 작품당 100~120분을 염두에 둬 100~120페이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시나리오의 설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덧붙여 명백하고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로써 결말에 관객의 모든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3막 구조가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대개 1막 ‘시작’ 30분, 2막 ‘중간 단계’ 60분, 3막 ‘갈등 해결’ 30분의 구성으로 2시간이 설정되었다. 2시간 정도 유지되는 관객 집중력을 고려한 결과라는, 수용자의 시선을 의식한 해석도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
하지만 주류 산업이 지배하는 영화 범주에서 살짝 눈을 돌리면 상영시간은 그리 단순하게만 수렴하지는 않는다.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는 9시간26분(566분),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3시간57분(237분), 텔레비전 시리즈 영화의 극장판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킹덤>은 4시간36분(276분) 등 2시간을 훌쩍 넘는 작품의 예는 수없이 많다.
돋보이는 실험성이나 메시지에 기울기보다는 대중적인 성공을 기대하는 영화 역시 2시간 공식을 깨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13년만에 나온 아바타의 속편인 <아바타: 물의 길>은 3시간12분(192분)에 달했다. 극장에서의 특별한 체험은 긴 시간을 기꺼이 감수하게 한다는 야심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2017년 <반지의 제왕> 3부작이 상영되며 마지막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4시간23분(263분)짜리 확장판으로 걸렸다. 2022년까지 집계된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역대 박스오피스 공식통계에 따르면 최고 흥행작 10편의 평균시간은 132분에 이르기도 한다.a)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도 러닝타임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OTT 겨냥 영화들은 3시간 이상으로 제작되는 일이 다반사. “각종 드라마·다큐멘터리 시리즈 전편을 한꺼번에 공개하는 방식을 쓰는 OTT 생태계에서 시청자가 6~8시간 몰아보는 데 익숙해졌고 긴 영화도 잘 견딜 수 있게 됐다”고 본다.b)
a) 아시아경제, 영화상영 중 화장실 다녀올 판…러닝타임-흥행의 함수관계 (2022.12.17)
b) 뉴시스, [클로즈업 필름]150분은 흔하다…요즘 영화 왜 길지 (2022.04.07)
영화관을 벗어난 상영의 장소는 역설적으로 영화를 잘게 나눠보는 관객을 낳기도 한다. 또 짧은 호흡으로 빠른 자극을 주는 콘텐츠가 쏟아짐에 따라 극장에서도 트렌드를 반영하듯 숏폼 영화를 걸었다. 최근 장편영화와 같은 정규 절차를 거쳐 극장에서 13분짜리 영화 <밤낚시>가 개봉해서 주목받았다. 작품 수용 방식이 달라지고, 다층적으로 분화되는 관객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더이상 2시간은 표준이 아닌 셈이다. 러닝타임은 아예 길어지거나 짧아지거나. 영화 상영 길이는 표준편차의 값이 커지며 분포가 넓어지고 있다.
현상적 시간 경험 너머
이렇듯 영화 상영 길이의 변화는 여러 현상을 담고 있지만 사실 영화 그 자체의 세계는 어쩌면 상영시간을 무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세계와 마주하고 겪는 시간에 대한 경험은 상대적일 수 있지 않은가. 어떤 순간은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 시간이 1초처럼 느껴지기도 하듯이.
이쯤에서 영화에 대한 독창적인 개념을 창안한 철학자 질 들뢰즈의 통찰을 빌려온다. 들뢰즈는 기존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전통 속에서는 ‘영화가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주목했던 흐름에 반해 ‘영화가 시간에 대한 어떤 경험을 낳는가?’를 제기한 바 있다. 이는 앞서 시간을 공간처럼 인지하는 근대적 사고를 비판한 앙리 베르그송의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영화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천착한 질문이었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공간화를 지적했는데, 가령 벽걸이형 시계를 바라보며 한 눈금 움직이는 시침을 한 칸 늘어난 줄자와 동일하게 여기는 태도를 재고했다. 시간을 일종의 길이로 이해하며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기의 틀을 깨고자 한 셈이다. 줄자와 같이 동질적인 성질이 늘어나는 것이 ‘연장’이라면 시간은 연장이 아니라 이질적이며 측정 불가능한 ‘지속(duration)’이라고 설명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인접한 순간마다 성질이 달라 정태적이지 않고 생성 혹은 변화를 부른다고 본다. 설탕과 물이 만나 설탕물이 되고, 액체가 기체로 상전이하는 것을 설명할 수도 있다.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성, 역량을 갖춘 게 시간이다.
한편 들뢰즈는 여기서 나아가 영화는 움직이는 단면들의 몽타주가 만들어내는 질적인 변화를 담는 세계라고 한 것이다. 관객은 움직이는 단면들, 곧 숏의 몽타주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양상을 보며 시간을 적절히 이해하게 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같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물줄기’처럼 지속의 관점으로 시간을 바라보지만 ‘영화란 어떤 순간의 단면을 잘라 포착된 부동의 정사진들을 연쇄적으로 이은 환영,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보는 지점과는 결별한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는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시간에 대한 ‘간접적’ 재현인 운동-이미지, 시간에 대한 ‘직접적’ 현시인 시간-이미지로 분화시키며 논의를 심화한다. 이는 영화사의 연대기와도 연결돼 운동-이미지는 무성 영화에서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에 이르는 고전 영화에 상응하며 시간-이미지는 예술영화와 대항영화와 같은 1950년대 이후 현대 영화를 기술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물론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차치해도 좋다.
들뢰즈의 이론을 진전시키기에 준거가 된 ‘지속으로서의 시간’, ‘시간의 매체인 영화’라는 개념은 결국 영화가 실제로 펼쳐지는 시간과는 별개로 관객과 호응할 여지를 무한히 남겨둔다.
일단 산업적으로 영화는 어떤 분기점 앞에 선 것은 분명하다. 표준이라 여겨온 상영 길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영화의 구조를 재설정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만큼 영화의 적응성이 다시 시험대에 오르기도 하겠지만 매체의 표현 방식이 더욱 다양해지는 폭발력은 커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누리는 자로서 기대감을 높여봄과 동시에 러닝타임이라는 숫자 저편 영화 예술이 산출하는 시간을, 이 세계의 시간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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