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가 커다란 랜드 마크를 세우곤 합니다. 사람이 몰리고, 돈을 벌어줄 거라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사례는 손에 꼽힙니다. 예술성과 상업성,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춰 공고히 세워내는 건 ‘적당히’라는 표현처럼 과정을 묘사할 때 쓰기에는 그토록 애매하나, 결과를 설명하는 것만큼은 명확히 눈에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한된 예산과 기한과 같은 많은 제약 안에서 나만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건 꽤나 막막해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예술성과 상업성 그 안에서 균형을 건물 하나로 이뤄낸 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은 그의 뒤틀리고 구겨진 천진한 건축물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떻게 많은 제약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으며 예술성과 실용성 그리고 전위성마저 추구할 수 있었던 걸까요? 건축가인 동시에 예술가인 프랭크 게리의 건축 세계를 지금부터 탐구하려 합니다.
천재의 영감은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의 건물은 입면이 없습니다. 즉, 건축물의 앞, 뒤, 옆을 정하는 대신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유로운 입체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그의 건축 세계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환경의 결과물로 보입니다.
유대인이 드문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게리는 비교적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놀려댔고, 이는 친구가 아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프랭크 게리가 철물점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작은 미래 도시 모형을 들곤 했다고 합니다. 훗날, 이 놀이 경험은 프랭크 게리의 모형 중심의 설계 방식과 금속 합판과 골판지 등의 소재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놀이 과정에서 재료의 본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탐닉하기 시작했고, 이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훗날 건축물의 특성으로 이어집니다.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는데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며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LA의 배경이 프랭크 게리를 구속받기 싫어하는 천진한 건축가로 키워낸 듯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진보를 더 소중히 여기고, 젊고 신선하며 낙천적인 기운이 넘치는 도시의 맥락처럼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은 인습에 젖지 않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프랭크 게리가 처음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자신의 집인 ‘게리 하우스’를 설계한 이후부터입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철과 목재, 합판 등의 재료를 조합해 만든 디자인은 일종의 판잣집과 같은 모습이었고, 그 기괴함에 마을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괴팍한 건물을 통해 무명의 프랭크 게리는 명성을 얻었고 훗날에 이 건물은 미국 건축가 협회의 가장 권위 있는 ‘25년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참신함이란
덧없는 추구를 벗어던지기
사실 해체주의 건축은 실용적인 기능에 집중하면서도 직선 형태인 모더니즘 건축과는 달리 곡선, 사선, 비기하학적인 파격적인 형태를 보이는 사조이지만, 프랭크 게리는 해체주의를 해체하는 태도로 건축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미 시도되었다고 주장하면 말이죠.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는 유기체의 순간적인 움직임과 역동적인 힘을 무한대로 팽창시켜 건축물에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모티브로 삼았던 기존의 것과 차이와 간격이 느껴지게 만듭니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Bilbao Museum)은 우주 범선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빛이 반사되는 티타늄 외벽은 우주 전함을 연상케 하지만, 프랭크 게리만의 주관적인 세계를 투영하기에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우주 전함의 모습과는 간극을 띄고 있습니다.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움직임을 담은 구겐하임 미술관은 슬럼화되던 빌바오의 분위기마저 역동적인 분위기로 동화시키게 됩니다. 나무 한 그루로서 지어진 한 건축물은 그렇게 그 주변마저 숲을 조성하듯 생기를 불어넣게 되고, 사람들은 이를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기 시작했죠.
또한, 프랭크 게리는 모티브로 삼았던 것의 다양한 의미를 확장하여 새로운 의미를 자신의 건축물에 불어넣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한국 최초의 프랭크 게리의 건물인 루이비통 메종 서울입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역사를 가진 수원화성과 동래학춤을 모티브 삼아 지어진 건물인데요.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공간에 따라 기존의 것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여 색다르면서 다양한 의미로 전달됩니다. 네모난 형태 위에 얹힌 수원 화성의 포탑 지붕과 동래학춤의 춤선에서 따온 이미지의 조화가 마치 건물 위를 유영하는 하얀 돛단배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듯해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이 흐드러진 유리 패널이 도포 자락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건축의 영속성을 위해서
항상 선행되는 질문, How?
“훌륭한 연극에서 관객은 무대를 초월해 연극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배우들도 연극에 빠져들고, 관객을 느낄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건축가도 공간을 디자인할 때 그런 점을 감안합니다. 어떻게 이 공간을 사람들에게 친밀한 공간으로 만들까? 어떤 건물이 싫은지, 어떤 공간이 싫은지, 사람들은 압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표현합니다.”
_프랭크 게리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접한 독자라면,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Walt Disney Concert Hall)을 보는 순간 프랭크 게리의 작품임을 깨닫게 됩니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LA 다운타운에 문화 중심지를 만들기 위한 건물로, 월트 디즈니의 아내 릴리언 디즈니의 기부금으로 첫 삽을 떴습니다. 하지만 설계도 3만여 장에 장장 16여 년에 걸친 공사로 한때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도 처했었지요. 그는 왜 이 프로젝트를 장기간 추진하려 했던 걸까요?
프랭크 게리의 철학을 통해 독자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기획이란 그저 빨리 해치워야 하는 잡무가 아닌 건축의 영속성을 위한 솔직하며 기초적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인간적인 공간이 될 때까지 이 대화 속 질문은 계속됩니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디자인할 때, 그는 ‘어떻게 이 공간을 사람들에게 친밀한 공간으로 만들까?’, ‘어떻게 하면 연주자는 청중을, 청중은 연주자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등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 대화 속, 끊임없는 질문은 어쩌면 그의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외관도 인상적이지만, 진가는 내부의 시스템에서 직감적으로 와 닿습니다. 그는 무대를 중앙에 두고 원형 경기장처럼 빙 둘러앉아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좌석을 배치했습니다. 특히 2,400여 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은 공간 구성과 악기, 좌석 등을 과학적으로 배치해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음향을 선보이고 있지요. LA필하모니의 본거지기도 한 콘서트홀은 그야말로 감각적으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공간입니다. 어떻게 감지하는지는 모르지만, 자명한 점은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프랭크 게리만의 독창성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건물들은 예술성과 실용성 그 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미를 생동감있게 담아내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의 건축 철학을 엿보면서 필자는 수없는 제약 속 나만의 세계를 균형감 있게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전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릴 수 있는가와 같은 허무맹랑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 참신함이란 헛된 추구를 벗어 던지고 주어진 것을 해체하며 “왜?”가 아닌, “어떻게?”라는 질문을 불어 넣어 역동적인 나만의 방향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말이죠. 나무 한 그루로 시작한 나다운 방향성이 훗날 숲을 조성하듯 무언가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