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를 떠올려 봅니다. 작가와 관객은 직접 만나지 않아도 작품을 매개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필자는 작품을 만든 이와 보는 이, 둘 사이 ‘균형’을 생각합니다. 균형이란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관객보다 작품을 만든 작가에게 무게중심이 있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작가에게 너무 무겁게 치우쳐 있어 관객이 힘을 잃곤 합니다. 작가는 그만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난해한 모습으로 전시합니다. 필자 또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친다는 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작가와 관객 간 일방적인 관계를 넘어 균형을 이룬 프로젝트들을 만나봅니다. 관객에게 더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기를 요청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천 명의 손에서 탄생한 책
어떤 작가는 관객을 작품 깊숙이 불러오고, 그들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도록 합니다. 필자는 안규철 작가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에서 이러한 참여형 작품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수많은 이미지와 자극의 시대에, 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를 보여주고 그 의미를 이야기하는 전시였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를 혼자가 아닌, 관객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시는 관객이 채워 넣어야 할 빈칸들로 가득한 전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작품은 <1,000명의 책>입니다. 관객의 참여로 이어지는 필경 프로젝트로 한 사람씩 작은방에 들어가 문학 작품을 필사합니다. 한 사람의 시간이 끝나면 다음 사람이 작품을 이어 필사하는 방식으로 전시가 진행되는 5개월간 천여 명에 이르는 관객이 참여했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는 다른 관객들은 필사 중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게 아닌, 아직 미완성인 작품 속으로 들어가 함께한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전시가 종료된 후 참여자에게는 각기 다른 글씨체로 필사한 흔적이 그대로 담긴 책과 연필, 지우개가 선물로 제공되었습니다. 책 속에서 필자가 참여한 부분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우리가 이 전시를 통해 연결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지금 여기 부재하는 것, 우리가 잃어버렸으나 다시금 떠올려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바라볼 때와 달리 온몸으로 경험한 메시지는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속 잔해들을 비우는 방
불과 물, 빛과 소리, 향기 등 다양한 감각으로 설치 작품을 선보인 김승영 작가의 ≪땅의 소리≫ 전도 관객을 작품 속으로 불러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을 방지하고, 전시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당 5명만 관람할 수 있도록 제한된 공간이었습니다.
전시는 시각은 물론 청각과 후각 등 오감을 일깨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관객이 푸른빛으로 가득한 방에 들어서면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곳곳에 놓인 낡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마음속 응어리를 적고, 종이를 구겨 버리는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전시를 감상하고 미술관을 나서면 길을 따라 설치된 거리갤러리에서 ≪바람의 소리≫ 전시가 이어졌습니다. 거리갤러리에서 관객은 벽돌과 화단, 유리창과 문을 열어보게 만드는 작품 등 곳곳에 숨은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나의 작업은 나와 타자와의 소통의 방식이자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수단이다‘는 작가의 말처럼 직접 작품을 경험하면서 나와 타인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낸 순간이 아닌, 수많은 이들이 체험하고 고민과 의미를 더할 때 비로소 끝을 맺음을 깨달았습니다.
수화기 너머 흘려보내는 고민들
설은아 작가는 관객들의 말 못 할 고민들을 모아 멀리 떨어진 곳, 이를테면 사막 한가운데 풀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지난해 ≪3650 Storage – 인터뷰≫ 전시장에는 오래된 전화기 6대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관객이 전화를 받으면 이름 모를 누군가의 부재중 메시지가 재생됩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 마음속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 한편에 공중전화박스가 마련되어 있어 관객들도 수화기를 들어 이야기를 녹음할 수 있었습니다.
설은아 작가는 이처럼 사람들의 숨겨둔 이야기를 수집했습니다. 4년간 10만 통이 넘는 이야기를 수집해 대자연에 목소리를 풀어주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배경은 건조한 바람이 부는 사하라 사막이 되기도 하고 아이슬란드의 푸른 빙하 앞이 되기도 했습니다.
관객들은 자연 속에서 흩어지는 목소리를 상상하며 자기만의 비밀, 남모를 이야기를 녹음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도, 그들의 이야기가 사막 한가운데 사라지는 모습을 영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나를 치유하고, 타인의 치유를 지켜보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습니다.
작가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고, 균형을 생각하는 건 다소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작품을 구상해 만드는 건 작가의 몫, 그것을 바라보는 게 관객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 느껴지는 고정된 생각을 흔들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습니다. 일방적으로 작품을 보여주고 감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더 가까이 만나고 작품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면 어떨까요? 오늘 소개한 작가와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관객이 감상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게 하는 예술을 경험해 보길 추천합니다.
- 뉴시스, ‘불·물·빛·소리·향기’의 위로…김승영 ‘땅의 소리’ (2021.03.29)
-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5: 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