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 진실성, 관찰자.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 켄 로치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는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갈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요.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지만 이야기는 그 어떤 현상보다 잔인하게 다가옵니다. 첨예한 갈등 구조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언젠가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는 암시 때문일까요? 하지만 잔인하다고 해서 눈 감을 수는 없습니다. 이 시대의 불균형을 직시하는 일로부터 균형을 향해 진보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켄 로치의 작품을 조명해봅니다.
켄 로치의 세계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켄 로치 감독은 노동계급 지역에서 자라며 투쟁과 고난의 연속인 삶에 내재한 희비극에 일찍이 심취했다고 합니다. 이후 방송사 BBC에 입사해 동시대 생활상을 담는 드라마 제작 부서에서 불법 낙태의 위험성과 그로 인한 사회 문제, 영국 주거 위기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찍으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프랑스 누벨바그, 체코 1960년대 영화 사조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던 끝에 1969년 탄광촌에 사는 한 소년에 대한 영화 <케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공감하는 관찰자여야 한다”는 태도를 강조하는 그는 먼발치에서 캐릭터의 개성을 극대화하고 교감과 공감을 끌어내며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도록 유도합니다.
이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칸 영화제에서 첫 황금종려상을 받고 2013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책임을 느끼며 영화계에 돌아와 영국 복지 제도의 허점을 지적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만들고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습니다.
켄 로치의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죠.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지역 언어를 녹여낸 각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카메라 위치, 시야각과 비슷한 렌즈 화각의 사용, 인물을 호의적으로 비추는 자연광, 움직임과 대화가 갖는 리듬, 캐릭터가 보유한 직업 경험이 있는 배우 등을 조화시킵니다. 결국 그가 담아야 할 건 자연스러움과 그게 진짜라는 믿음이라는 것.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사연은 우리에게 와닿습니다.
인간을 삭제한 시스템의 무자비함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성실한 목수로 살던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이 심해져 일을 쉬어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수당을 지급받는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반려되죠. 하는 수 없이 실업수당을 대신 받고자 했지만 복잡한 체계 탓에 신청은 더딥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안간힘을 쓰며 일자리까지 얻으러 나서지만 건강 때문에 도저히 일은 할 수가 없어 좌절감에 빠집니다.
한편 런던에서 두 아이와 함께 뉴캐슬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를 구직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다니엘. 상담 시간에 고작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복지 제재 대상이 되는 사정을 지켜보며 제 일과 같이 느낀 다니엘은 도움을 주고 친해집니다. 그렇게 다니엘과 케이티는 서로 의지하게 되지만 사람 위에 군림하는 ‘비인간적 국가 시스템’은 그들을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기만 합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은퇴 노동자,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한 인물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현시대의 부조리를 살피게 되는데요.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는 현재진행형일 것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수렁에 빠지는 일상
<미안해요, 리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리키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택배 노동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고용 계약이나 목표 실적 없이 배송 수수료를 받으며 일하는 서비스 제공자, ‘고용되는 게 아니라’ 개인 사업자 가맹주로서 ‘합류한다’는 말에 달콤한 미래를 꿈꾼 그. 자신만 노력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리키가 결국 거대한 자본의 톱니바퀴 속에서 착취 당하는 노동자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더 많은 업무를 떠맡지만 이는 가정불화로 이어지고 기대와는 다른 일상이 펼쳐집니다. 회사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데요.
그저 소소한 행복을 바랐던 택배 노동자의 아슬아슬한 삶은 새벽배송이나 당일배송과 같은 시스템에 길들어 지워진 존재를 바라보게 합니다. 지나친 과업으로 인해 일어나는 택배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으로 그간 가혹한 현실이 증명되어 왔지만, 우리 곁에 있던 수많은 리키를 여전히 얼마나 망각하고 지냈는지 일깨웁니다.
타자화된 공동체가 공생하는 법
<나의 올드 오크>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에서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티제이는 어느 날 낯선 버스를 타고 마을에 당도한 이들을 맞이합니다. 전쟁으로부터 도망쳐온 시리아 난민이자 사진작가를 꿈꾸는 소녀 야라를 비롯 해 야라 가족과 무리가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탄광산업의 붕괴 이후 덩그러니 남겨진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팍팍하기에 그들을 배척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티제이는 야라와 난민들을 보듬으며 선의를 베푸는데요.
두 공동체는 모두 주류에서 벗어나 이방인이 된 집단이라는 공통점에도 섞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나고 부딪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지난한 시간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집단의 경계 밖 외부인에 대한 날 선 시선을 극복하고 공생할 여지를 찾아가는 해법은 생각보다 사소한 행위에 녹아있습니다.
차가운 두 전작에 비해 따뜻한 온기가 깃들어 있는 이 작품에서는 용기, 연대, 저항으로 약자들이 힘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이상이 엿보입니다.
평범한 노동자 계급의 이야기를 전하는 프로젝트에 천착한 켄 로치는 이제 그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노동계급의 삶이 어떻게 규정되고, 이 사회는 그들에게 어떤 선택지를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한 결과들은 이제 관객에게 더욱 사무칠 것 같습니다. 아니, 더 이상 켄 로치의 작품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실주의’가 아니길 바라고도 싶네요.
감독은 제작진 중 한 명에 불과하다며 제작 현장의 위계를 허무는 것에서부터 균형을 향한 신념을 확고히 드러냈던 켄 로치이기도 했습니다. 작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영화 인생 내내 흔들림 없이 지켜온 삶의 태도가 그를 거장이라 평가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