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상품이 되었다. 이 얼마나 자명한 문장인지. 조각이 상품이 된 지는 너무나 오래라서, 이제 우리는 조각을 사고팔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도 지구 위 어딘가에서는 조각이 전시되고, 팔리고, 교환되고, 소장되고 있다. 조각을 두고 누군가는 생산자가 되고 누군가는 중개인이 되며 누군가는 소비자가 된다. 이 멋진 상품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 한 번 저 문장을 뒤집어보면 어떨까?
“상품은 조각이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혹은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여전히 저 문장에 묘한 꺼림직함을 느낀다. 조각을 사고팔 수는 있을지언정, 상품이 조각으로 불리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내가 미술사 수업에서 끊임없이 레디메이드에 대해 배우고, 뒤샹의 <샘>을 접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샘>에서 중요한 것은 남성용 소변기 자체가 아니라 뒤샹의 반역적인 태도와 사고방식이라 생각하고 만다. 소변기는 단순히 뒤샹의 정신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 뒤샹이 직접 써넣은 R.Mutt라는 서명 없이는 소변기가 조각이 될리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번 아티클에서는 ‘상품조각’으로 불리는 1980년대 일군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상품조각은 ‘레디메이드가 가진 아방가르드적인 태도’를 걷어내고 상품 그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들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떻게 상품과 교환가치가 미술 안으로 흡수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이들의 작업은 아마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낯설 텐데, 왜냐하면 이들의 외향은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들이 주장하는 자신의 지위는 우리를 지루하게 하는 ‘시시하고 통속적인 사물’을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삶에 교묘히 스며들어있는 자본주의 물신을 가시화함으로 물신 주위를 둘러싼 욕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상품조각은 무엇일까?
상품조각의 실질적인 예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상품조각의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술사학자 핼 포스터(Hal Foster)는 『실제의 귀환』의 네 번째 장 「냉소적 이성의 미술」에서 1980년대의 미국의 두 가지 미술 경향을 분석한다. 포스터의 관점에서 1980년대 미국을 관통하는 미학은 “인습주의 미학(conventionalist aesthetic)”으로, 그는 ‘시뮬레이션 회화’와 ‘상품조각’을 이러한 미학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그는 상품조각을 시뮬레이션 회화와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며 인습주의 미학을 보여주는 주요한 미술 경향으로 꼽는다. 포스터는 상품조각이 물신숭배 자체를 테마로 삼으며 고급 형식과 저급 형식의 차이를 소멸시켰다고 보았는데, 그는 상품조각의 레디메이드에서는 뒤샹적 레디메이드의 제도 비판적 성격이 사라지고 소비사회의 ‘기호 교환 가치’만 남아 이것이 미술과 미술제도를 재신비화한다 주장한다. 포스터의 정의를 따르자면, 상품 조각이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기호 교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군의 레디메이드를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품조각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무엇이 있을까? 제프 쿤스와 하임 스타인바흐의 1980년대 조각이 대표적인 상품조각으로 꼽힌다. 쿤스와 스타인바흐는 모두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품’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들 작품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이들이 상품을 레디메이드로써 제시할 뿐 아니라, 상품이 놓이는 좌대 역시 작품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이다. 쿤스는 <뉴 후버 컨버터블>에서 형광등이 하단에 설치된 플렉시글라스 상자 안에 후버 청소기를 올려두었고, 스타인바흐는 <울트라 레드>에서 가판대를 연상시키는 구조물 위에 상품이 올려진 형태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들은 모두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언제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진열되고 전시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매장의 디스플레이 방식을 차용해 자신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들 조각에서 전통적인 좌대는 사라지고 오직 판매대만이 상품을 떠받들고 있다. 이들이 차용하고 있는 것은 상품 그 자체를 넘어서 상품을 물신화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인 것이다.
상품조각에 대한 비판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물신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는 상품조각에 대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부정성을 그대로 차용하는 작품에는 과연 그들의 태도가 비판인지 전유인지에 대한 논쟁이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쿤스는 자본주의 상품 물신을 차용하는 작품을 통해 미술시장의 총애를 받는 작가로 등극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상품 물신의 정의를 설명하며 이야기한 포스터가 대표적으로 상품조각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미술사학자이다. 그는 1980년대 상품 조각을 1970년대 차용미술과의 관계라는 통시적 관점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1980년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라는 공시적 관점 사이에 두고 면밀히 분석한다. 포스터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냉소적 이성(cynical reason)” 개념을 통해 시뮬레이션 회화와 상품 조각이 후기 자본주의와 공모하는 방식을 잘 설명한다. 그는 상품조각이 미학적 갈등이나 정치적 모순이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그 현실을 부인하는 양가성을 가진다고 말하며, 이를 “정신분열증적 교태”라고 비판한다. 포스터가 보기에 1970년대의 차용미술에서는 참여주의와 댄디즘(자기 비판적인 쁘띠-부르주아)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며 비판성을 드러냈지만, 1980년대 미국에서 레이건주의가 확산된 후 이를 이어 등장한 “냉소적 이성의 미술”은 시뮬레이트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그러한 비판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상품조각을 다시 읽을 수는 없을까?
포스터는 분명 상품조각이 등장하게 된 당대의 사회상과 상품조각의 미술사적 계보를 면밀하게 짚어내며 타당한 비판 의식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그가 「냉소적 이성의 미술」을 쓴지 약 20년 이상이 지난 후의 독자로서 나는 상품 조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 역시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 다국적 명품 기업이 미술의 외양을 복제하며 사치재를 마치 예술인 양 팔아치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상품물신을 전유하면서도 미술이라는 형식에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있고자 하는 상품조각의 이중적인 욕망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일말의 저항을 내포하며 “구원의 안감”을 짜고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상품 조각이 벌이는 ‘엔드게임’도 마찬가지이다. 포스터는 지난 세기말에 상품 조각이 과거의 레디메이드와 달리 미술제도 자체의 전복(미술의 종말)이 아니라 엔드게임이라는 일종의 무의미한 시뮬레이션을 벌이고 있다 비판했지만, 그 유희적인 전유가 미술이라는 특수한 채널, 즉 제도 공간 안에서는 비판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이제는 발견한다. 이미 제도비판 미술과 그 후예들이 정전으로써 미술제도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그들의 역사성을 논하게 된 지금 우리는 상품 조각이 미술제도 안에서 벌이는 게임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이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에서 “(게임의) 라운드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고 갈 길을 갈 것이다. 어쩌면 우스워 보일 지도 모르나 실제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와 같이, 미술이 정말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 물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며 종말을 향해 가는 것보다는 ‘미술관 안에서 종말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미술을 상품이 아닌 미술로 인식하게 하는 미술 제도와 미술 공간은 외부의 질서에 저항하는 철저한 개입 불가능성, 즉 관조라는 유구한 ‘예술 게임’의 규칙을 여전히 품고 있는데, 이 규칙은 현재에 이르러 상품 물신에 대한 비판적 확장팩이 추가되며 관람자에게 한정된 개입으로도 이 엔드게임의 알고리즘을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친다. 우리는 작품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자동적으로 상정하는 관조의 규칙이 지배하는 미술관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상품 조각이 전유하는 물신의 아우라에 저항하는 방식을 이제 일정 부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예술에 대한 해석은 항상 달라지기 마련이고, 그것이야말로 나는 비평과 해석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점점 파국으로 치달으며 파열음을 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부정적인 것을 수동적으로 답습하며 이를 거부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세계 안에서도 새로운 가능성과 해석의 즐거움을 찾아내 변화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비록 새로운 해석의 즐거움을 찾아내고자 하는 미술이 ‘냉소적 이성’의 미술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