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워질 기미가 없던 공기가 비로소 서늘해졌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를 돌아보고,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는 계절입니다. 새해 인사를 고민하다 보면 상투적인 붙여넣기 인사가 아니라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고 싶어지는 특별한 상대가 생각나기 마련인데요. 그럴 때면 제법 낭만적이어서 두고두고 간직하다가 슬쩍 꺼내보게 되는 시구를 인용해 인사를 전하면 어떨까요? 너무 차린 것 같은 표현이나, 여러 번 곱씹어야 간신히 해석할 수 있어 난감한 시가 아닌 직관적인 진심을 담은 시를 소개합니다. 무심한 듯 재치있는 격려부터 절박한 사랑과 변치 않는 충정을 담은 문구까지,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는 모양을 담은 여러 종류의 시를 모았습니다. 낭만 허용치를 늘리는 것이 허락되는 계절의 힘을 빌려, ‘시’가 직접 제조해 준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보세요. 어쩌면 그에게 평생 간직하고 싶은 글로 남을지도요.
짓궂게 덕담을 건네고 싶다면
“나쁜 데 써도 돼”
이문재, ‘문자메시지’
최고의 위로는 돈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금융 치료’라는 말이 상용되는 사회니까요. 이 시의 핵심은 가장 현실적인 특효약을 처방하면서 덧붙인 동생의 뒷말입니다.
“나쁜 데 써도 돼.” 어렵게 돈을 보냈더니 말도 안 되는 용도로 소진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지요. 시인의 소박하고 미련한 삶이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바람이 잔뜩 들어간 이 말을 들은 시인의 마음을 상상합니다. 농담과 진담을 섞으면서 형의 처지를 헤아리는 복잡한 동생의 마음도 상상해봅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떤 문장에 더 발목 잡히시나요?
인사를 건네는 이, 인사를 건네받은 이의 마음을 모두 헤아려보면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시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조만간 새해 안부를 건네고 안부를 건네받을 여러분과 상대방의 상황과 닮았다는 사실이요. 이 시의 등장인물들처럼 진지해지기 부끄럽다면, 일상에서 돈을 보내는 사소한 상황에 재치 있게 덧붙여보는 건 어떨까요? “나쁜 데 써도 돼.” “넌 우리나라 최고의 연인/동료/가족/친구잖아.” 다른 때였으면 왠지 조롱처럼 들릴 말도 한 번 곱씹어보다가 괜히 코끝이 시큰해질지도 모릅니다. 연말이니까요.
“없는 놈이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작자 미상, ‘와병중’
지금은 중고 서적으로만 구할 수 있는 『슬픈 우리 젊은 날』은 서울 대학가 서클 시 모음집입니다. 작자 미상으로 주인 없이 버려지는 낙서이자 푸념 같은 시들을 모아 문학으로 출간한 것이죠. 강의실, 도서관은 물론 술집, 레스토랑, 다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낙서를 수집해 엮다 보니 험난한 시대를 지내는 젊은이들의 삶의 냄새가 풀풀 풍깁니다. 치기 어린 사랑에 대한 한탄부터 억압과 불법의 정치를 비난하는 속 끓는 분노, 미래를 걱정하며 위태롭게 휘청이는 청춘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지요.
그 중 <와병중>이라는 걸출한 제목을 달고 있는 낙서에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옳은 말이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허물없는 사이에 실제로 거리낌없이 나누는 말이기도 하고요. 순간 암호인가 착각하게 만드는 그럴듯한 “C-8”까지, 자조 섞인 낙서에 묻어나는 재치가 과연 청춘답습니다.
젊은 날부터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인 친구에게 이 시를 보내보세요. 무사한 나의 안부를 전하는 방법도 될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네 처지도 잘 아니 넌 몸이라도 건강히 지내라는 덕담이자 장난도 될 수 있고요. 연말 인사를 재치 있게 건네며 여전한 우정의 빛깔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고 싶다면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이상, ‘동생 옥희 보아라’, 『중앙』 1936년 9월호에 발표
시인이자 예술가 이상을 어떤 이미지로 기억하시나요? 분야를 가리지 않은 시대의 천재, 제멋대로 살았던 광기의 예술가, 여성 편력이 심한 난봉꾼, 스물일곱에 요절해 버린 까닭에 그의 ‘신비로운 천재’ 이미지는 그대로 박제되었습니다. 그런 이상에게 또 다른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축복하는 다정한 오빠의 면모입니다.
이상의 동생 옥희는 어느 날 연인과 함께 몰래 만주로 도주합니다. 당대 여자가 애인과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은 쉬이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 겁니다. 집안의 망신이자 수치로 여겨지고도 남았지요. 야반도주 사실을 알게 된 이상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로 잡지에 산문을 기고합니다. 당장 돌아오라는 질책의 편지였을까요? 그는 동생을 향한 애틋함과 고마움, 무조건적인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편지로 동생의 장래를 축복합니다.
“나까지 속이고 그랬다는 것을 네 장래의 행복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네 큰오빠 나로서 꽤 서운히 생각한다.”, “어린애로만 생각하던 네가 어느 틈에 그런 엄청난 어른이 되었누.” 오빠 이상은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줬어야지’ 하며 섭섭해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평소 얼마나 우애가 두터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왕 나갔다. 나갔으니 집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너희들의 부끄럽지 않은 성공을 향하여 전심을 써라.”, “이번 너의 일 때문에 내가 깨달은 바 많다. 나도 정신 차리마.” 그리고는 용단 있는 결정을 내린 동생의 강단을 칭찬합니다. 자기도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전하며 동생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하지요. 무서운 처분을 예상했을 동생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오빠의 무조건적인 축복과 지지, 변함없는 사랑과 충정에 눈물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저는 ‘축복한다’는 말의 농도를 이상의 편지에서 처음 느꼈습니다. 이상의 표현대로 ‘노말’에서 조금이라도 비껴가는 순간 여지없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세상에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해 없는 세상에서 언제라도 내 편’인 존재가 있다는, 혹은 있을 수 있다는 마지막 보루 같은 말과 붙어있는 ‘축복한다’는 단어가 얼마나 반짝이던지요.
이해와 실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시대에서 줄타기하듯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때로는 대책 없이 낭만적인 마음에 기대고 싶을 만큼 절박한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순간에 부적처럼 꺼내어볼 수 있도록, 고단한 한 해를 기어이 버텨낸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축복을 건네봅시다. 간신히 척박한 삶을 견뎌내는 우리는 이까짓 낭만적인 말들에 기대어 사는 나약한 존재니까요.
소진된 존재를 격려하고 싶다면
“패배는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평가에 익숙해진 시대입니다. 무려 자기 삶에도 승패라는 평가를 내리는 습관이 보편화되었지요. 하지만 승리나 패배가 있기 전, 우리에게 ‘삶’이라는 긴 싸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봅시다. 화자는 승리나 패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싸움을 맞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기고 나면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으니 다시 패배로 돌아가거나 무한한 추락으로 종결됩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패배한다고 해서 손해볼 건 없지요. 어쭙잖은 승리에 도취하다가 불쑥 닥친 패배감으로 고통 받는 것보다, 달관하고 패배를 즐기는 것이 앞으로 평생 마주해야 하는 인생이라는 싸움을 계속 치를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승패라는 결과의 진단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니, 우리도 화자의 논리에 설득당해 보죠. 패배했다는 생각에서 굴욕을 느낄 필요가 없고, 이기는 것이 곧 희망이자 선이라는 생각을 버리자고요. ‘아, 또 졌네, 하하하.’ 크게 웃어버리고, 바람 속을 거닐 듯 시원하게 인생이라는 투쟁을 즐겨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패배했다는 사실에 무너지며 또 다시 패배하는 일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것”
나희덕,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박완서의 『나목』에는 ‘고목인 줄 알았는데 나목이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고목처럼 죽은 듯 사는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봄을 준비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나목 같은 사람이었다는 비유이죠. 나희덕 시인의 시에도 사망 선고를 받은 듯 얼어붙은 빨래와 죽은 듯한 별이 등장합니다.
이 시는 화자의 통찰이 빛납니다. 고드름이나 겨울, 얼어붙었다는 단어에 홀려 우리는 자연스럽게 빨래가 ‘녹을 것’이라고 표현하게 되는데요. 화자는 얼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인 빨래의 속성에 집중해 ‘마를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빨래는 당연히 녹을 것입니다. 별도 먼 훗날에는 소멸하여 빛을 잃을 것이고요. 하지만 시의 힘은 눈에 보이는 현실, 검증된 진실만으로 현재를 예단하지 않는 시선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시적 허용이 지닌 낭만이지요. 얼어붙은 빨래나 희미한 별들처럼 기댈 곳 없는 마음 끝에 간신히 매달려 한 해를 지나온 사람에게 이 시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어렵게 견디고 있는 시간의 본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는 맑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당신이 필요해요”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사람은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쓸모를 넘어 필요의 단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존재할 가치 있는 인간을 넘어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강력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필요’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각성을 일으키기도 하거든요. 나를 필요로 하는 자식을 위해 끝없는 싸움과 패배를 견디어 내는 부모처럼 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남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무겁고 아름답고 고독합니다. 그래서 경이롭습니다. 언제든 날아갈 것 같은 ‘사랑’이라는 변덕스러운 단어에만 기대지 않고, 현실적인 실리까지 엮여 더욱 강력한 감정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필요해요.” 라는 말은 내가 당신에게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것, 나 없이는 당신이 살 수 없다는 복잡한 감정을 응축시킨 문장입니다. 마치 사랑을 현실이라는 지면으로 끌어내려 선명히 감각하게 해주는 마력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우리, 때로는 상대 앞에서 연약하게 무너져봅시다.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말 대신 필요하다는 말을 건네봅시다. 세상에 우리 둘뿐인 듯 당신 없이는 안 된다는 애절한 위기감은 누군가에게 폭발적인 힘을 주기도 하니까요.
손석희 앵커가 진행했던 ‘앵커브리핑’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매년 마지막 앵커브리핑에서 아일랜드의 한 기도문을 낭독하며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곤 했습니다. 행복, 슬픔, 아픔을 겪으며 버텨온 모두의 삶은 저마다의 모양으로 특별하기에, 고된 한 해를 보낸 시청자들은 남을 위해 작성된 고대의 기도문에 기대어 위안을 얻곤 했었지요. 이 아티클을 읽으며 남을 위한 안부 인사 한 마디를 고르고 고르며 고민하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독자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아울러 여러분의 진심을 꾹꾹 담은 문장을 전달 받은 사람들의 앞날이 평안하기를 바라며 아일랜드의 격언을 인용해 이른 새해 인사를 보냅니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