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턴테이블로 LP를 재생하거나, 분위기 좋은 LP 바에 가는 것, 희귀한 음반을 수집하며 음악을 탐닉하는 것이 예전보다 비교적 대중적인 취향이자 취미가 되었습니다. 디지털 방식으로 음악을 양껏 소비해 온 세대에게는 불편한 부분이 많을 텐데 말이죠.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스트리밍할 수 있는데 구태여 더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물성이 있는 음반을 사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문득 음반을 사 모으며 음악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직접 구매한 음반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이 음반 하나를 구매하기까지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죠. 그래서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반을, 왜 소비했나요?”
실용적 낭만주의자
남필우가 소비한 음반
번거롭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사람
글로벌 아트에이전시 ‘핀즐(Pinzl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름 사진 매거진 ‘헵(hep)’과 뮤직&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비지엠(BGM)’의 편집장 남필우는 출판사 겸 디자인 스튜디오 ‘폴라웍스 아트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필우 님이 직접 구매한 음반 중 한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가장 최근에 구매한 이와무라 류타(Iwamura Ryuta)의 [Symphony]라는 앨범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일본 피아니스트 이와무라 류타는 제가 발행하는 ‘헵(hep)’ 매거진의 인터뷰이로 참여하며 친근해진 사이인데요. 국내에서도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노리다케가 그린 앨범 커버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뮤지션인데, 이제는 그의 철학이 담긴 음악 스타일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나요?
지난 9월에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서울레코드페어≫에 ‘BGM’ 매거진 팀으로 참여했어요. 구경할 게 많았던지라 중간중간 다른 셀러 부스를 구경하던 중 이와무라 류타의 CD들을 판매하는 곳을 발견했죠. 그의 이전 앨범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 없던 앨범이 보였는데, 그게 바로 [Symphony]였어요. 많은 인파를 뚫고 구매했습니다. 열여섯 트랙으로 구성된 이 앨범은 글을 쓰거나 디자인하는 등 작업할 때 큰 벗이 되어주고 있어요.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 궁금해요.
사실 앨범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라 한 곡만 떼어 설명하긴 힘들어요. 각 트랙마다 일상 속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전체 앨범을 구성하거든요. 지저귀는 새소리로 시작해 자동응답기 소리, 청소기의 소음, 타자 소리 등 조금 실험적일 수 있지만 피아노 선율과 잔잔히 어우러지고 있죠. 그래도 하나만 선택하라면 빈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7번 트랙 ‘Symphony VII / Rhapsodique’의 아련함에 끌리는 것 같아요.
필우 님은 음악을 굳이 음반으로 구매해 듣는 이유가 있나요?
손에 잡히는 물성을 좋아하는 이유가 큰 거 같아요. 카메라, 드립 커피 등 과정에 참여하는 것들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고요. 사실 무척 번거로운 것들이죠. 턴테이블만 하더라도 담소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판을 뒤집어 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느린 요소들이 가속화되는 세상에서 저만의 속도 밸런스를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반을 사고 재생하고 소장하는 과정도 재미있어요. 매장을 향해 걷고 앨범을 찾고 구매하는 모든 순간을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더 비싸고 번거롭지만 제게는 더없이 값진 순간이기 때문에 되도록 오프라인에서 구매하려고 해요. 이런 행위가 주변에 좋은 공간들이 더 많이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실천인 것 같기도 해요.
1인을 위한 선별자
지남희가 소비한 음반
음악을 고르는 사람
서촌에서 테이블 하나를 두고 한두 사람을 위한 일인용(공간) ‘일인용( ) 1P( )’를 운영하는 지남희는 일인용(음악)을 고르며, <오디오 극장>이라는 공연을 비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남희 님이 직접 구매한 음반 중 한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2014년에 발매한 Gigi Masin의 [Talk To The Sea]라는 LP예요. 구매한 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옷장에 남아 유행타지 않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처럼 2024년인 지금도, 10년 뒤 2034년에도 LP 장에서 종종 꺼내 들을 만한 앨범이죠.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나요?
암스테르담에 거주할 무렵부터 이 음반을 발매한 네덜란드 기반의 레이블인 ‘Music From Memory’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음반이나 책처럼 부피를 차지하는 무거운 물건을 구입하기는 아무래도 망설여졌어요. 서울로 돌아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을지로에 오피스 겸 카페인 ‘투피스’라는 공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이 음반을 구매하게 되었고요. 여전히 을지로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레코드숍 ‘클리크 레코즈’에서 구입했어요. 생각해 보니 제 경우 음반을 구매한다는 건 정착을 의미하네요.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 궁금해요.
모든 곡을 다 좋아해요.
남희 님은 음악을 굳이 음반으로 구매해 듣는 이유가 있나요?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종이책 한 권을 고르고, 그 책과 어울리는 LP 한 장을 꺼내어 앞뒤로 돌아가는 정도의 시간 동안 책을 읽고 덮습니다.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둘 때 나만의 동굴로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장치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무한한 eBook과 스트리밍은 글쎄요. 평생 동굴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역시 제게 음반과 공간은 연결되어 있어요.
순수한 청취자
김진우가 소비한 음반
책과 미술과 음악을 연결하는 사람
순수하고 안전한 세계를 구축하는 김진우는 예약제 서점 ‘블루도어북스’를 운영하며 공간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고, 방문하는 이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진우 님이 직접 구매한 음반 중 한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CD와 LP를 몇 장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지금도 계속 듣는 것은 시규어 로스(Sigur Rós)의 [Ágætis byrjun] CD입니다. 너무 좋아하고 좋아해서 귀에 들리는 소리를 손으로 잡고 싶었어요.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나요?
이 앨범은 중고 CD 가게에 많아서 쉽게 구할 수 있었어요. 값이 비싸지도 않아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습니다.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 궁금해요.
앨범과 동명의 수록곡 ‘Ágætis byrjun’을 제일 좋아합니다. 제가 처음 시규어 로스를 알게 된 노래고요. 가사는 몰라도 어쩐지 한참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들었습니다. 몇 년 뒤에 가사를 찾아보고 그 내용이 너무 예뻐서 더욱더 좋아져 버렸지요.
진우 님은 음악을 굳이 음반으로 구매해 듣는 이유가 있나요?
말씀 주신 그대로 ‘소장’할 수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스트리밍은 정말로 편리하지만 음악을 소장한다는 느낌은 어딘가 조금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반면 그것을 ‘굳이 굳이’ 그렇게 가지고 있는 그 상태가 좋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손으로 만지고 싶었어요. 그것이 아마 가장 순수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취향 탐색가
명유빈이 소비한 음반
감각적인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사람
취미로 바이닐을 모으는 명유빈은 음악 프로듀서 2wnt7(투웬티세븐)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하우해브유빈’을 통해 많은 이에게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빈 님이 직접 구매한 음반 중 한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오오누키 타에코(Taeko Onuki)의 유럽 3부작 중 하나인 [ROMANTIQUE]입니다. 구매하고 나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앨범을 떠올리며 선정해봤어요.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나요?
새로운 음악을 디깅하는 건 저의 중요한 루틴인데요. 이 앨범은 처음 듣자마자 완전히 반해버려서 “이걸 안 사는 건 죄다!” 하면서 구매했어요. 1980년도에 발매된 음반이라 국내에는 매물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이 음반이 제 인생 첫 해외직구 물품이 됐습니다. 일본에서 날아온 바이닐을 받아 들고 너무 기뻤는데, 몇 달 뒤부터 레코드숍을 다닐 때마다 이 앨범이 보이더라고요. 시티팝의 인기 때문인지 갑자기 명반들이 재발매되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고생하며 구매했는데…
앨범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트랙이 있나요?
5번 트랙 ‘BOHEMIAN’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 앨범의 편곡은 오오누키 타에코와 자주 호흡을 맞췄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는데요. 그만큼 특유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돋보입니다. 적당히 리드미컬한 템포,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솔로, 맑으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느껴지는 보컬까지 예술입니다.
유빈 님은 음악을 굳이 음반으로 구매해 듣는 이유가 있나요?
좋은 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고, 때론 불편함이 몰입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요. 음악을 스트리밍하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손가락을 까딱하며 다음 곡으로 넘길 수 있잖아요. 선택지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몰입은 줄어든 것 같아요. 반면 CD와 LP, 테이프로 감상할 땐 취향이 아닌 곡이 흘러나와도 굳이 다른 음반으로 바꾸는 게 번거롭고 불편해 꾹 참고 들어요. 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의도나, 몰랐던 제 취향도 알게 되는 거죠. 인간이 손으로 만지는 경험을 하면 ‘내 것’이라고 느낀다는 말이 있어요. 음반을 소장하고, 플레이어에 넣고 버튼을 누른 뒤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구매’는 참 중요한 것 같아요.
MP3 플레이어 세대였던 필자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실 음반을 구매해 본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 작년에 선물 받은 몇 장의 LP와 턴테이블에는 먼지만 쌓였고요. 그러다 이번 기회에 음악을 고르는 사람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점차 음반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물성이 있는 음반의 형태로 소장한다는 것은 더 큰 돈과 시간을 들이고, 선반이나 수납장 등 공간의 일부를 음악에 내어준다는 뜻일 겁니다. 음반을 보고 만지는 행위는 음악을 더 밀접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방식인 것 같고요. 뭐든지 번거로움이 더해질 때 각별한 마음이 생기나 봅니다. 이번에 소개한 네 장의 음반도 분명 애정을 받고 있겠죠. 여러분도 더 각별히 사랑하고 싶은 음악을 음반으로 구매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