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특히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초현실주의적 미학을 통해 관객을 꿈과 현실의 경계로 이끌며, 삶과 욕망, 그리고 자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가장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수 없이 휩쓸려버리는 우리의 감정과 예기치 못하게 마주하는 삶의 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난해한 영화를 따라가는 여정은 그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작은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그 시도만으로도 삶의 경험들을 이해하는 데 좀 더 가까워질 수도 있죠.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초현실주의가 남긴 흔적과 영향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장면들을 통해 질주하는 영화 이미지 속에서 삶의 다양한 층위를 탐구하는 감상 포인트를 만나보세요.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으로
1) 초현실주의, 무의식의 세계를 펼치다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및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우리에게 초현실이라는 말은 무척 익숙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오늘날에도 광고, 영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영향을 꾸준하고 뚜렷하게 미치고 있는 미술 사조입니다.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유발하며 사람들을 매혹하죠. 올해는 1924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기조를 내세우며 이미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는 물건에 예술 작품이라는 라벨을 붙이거나, 전통적인 예술 작품이 지닌 모든 관습을 파괴하고자 시도했던 다다이즘(Dadaism)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념을 중요시하던 전통에 반발하며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무의식을 깊이 탐구했죠. 초현실주의는 이처럼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탐험하며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의식하게 합니다. 예술 형식 뿐만 아니라 삶을 감각하는 새로운 방식과 접근을 제안한 것이죠.
2) 중첩되는 시각적 충격, 초현실주의 영화
당대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에 영향을 미쳤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자아를 인간 내면의 일부로 구조화합니다. 가장 아래 심층적인 무의식의 영역에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원초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는 욕망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오지 않고 우리가 일상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억압하는 초자아가 위치합니다. 초자아 덕에 우리는 가끔 터져 나오는 말실수나 꿈을 통해서만 무의식의 이미지를 만나게 되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이런 꿈속의 이미지들을 회화, 조각, 영화 등 구체적인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초기 초현실주의 영화로는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의 “안달루시아의 개(An Andalusian Dog, 1929)”와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인의 피(The Blood of a Poet, 1930)”가 대표적입니다. 안달루시아의 개에 등장하는 인물의 안구를 도려내거나, 손바닥에서 개미 떼가 기어 나오는 이미지들은 마치 악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낯설고 충격적인 감각을 자아냅니다. 일반적인 영화를 구성하는 서사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쉴새없이 떠오르는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마치 꿈의 장면들이 영화를 통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죠.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언급되기도 했던 자동기술법(Automatism)은 이처럼 초현실주의적 창작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앙드레 브르통은 이성으로 통제하지 않고 자동으로 솟아나오는 것들이 정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으니 꿈을 꾸지 않더라도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사유와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예술 작품, 특히 영화를 감상할 때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하는데요, 마치 꿈을 꾸듯 전환되는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는 것입니다.
3) 데이비드 린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독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는 초현실주의적 미학을 현대 영화에 접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영화감독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는 프랑스 영화 전문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가 2000년대 최고의 영화로, BBC가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 중 1위로 선정하며 시대가 인정하는 영화의 반열에 올랐죠. 하지만 여전히 매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 가장 난해한 영화로 손꼽히곤 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가득한 초현실주의적 요소들 때문에 얻은 명성인 것 같은데요. 장면이 꿈처럼 휙휙 전환되며 일방향적으로 흐르지 않는 사건의 전개는 관객이 영화를 시간 순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혼란스러운 장면들이 갑자기 등장해서 때로는 해석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죠. 환각을 체험하는 듯한 이미지가 튀어 나오는가 하면,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감으로 시각을 현혹하기도 합니다. 영화 중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푸른 열쇠와 푸른 상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습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감상할 때 염두에 두면 좋을 포인트는 이미지 자체가 지니고 있는 매력과 힘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그리고 사운드의 작동에 집중해 보는 것입니다. 매혹적인 이미지와 강렬한 색감, 일상적인 장면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는 영화에 보다 몰입하고, 마치 일상을 넘어서 새롭게 창조된 세계로 흘러 들어가게끔 합니다. 쏟아지는 장면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초현실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초대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죠. 그럼, 그의 대표작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대해 본격적으로 감상해 볼까요.
멀홀랜드 드라이브,
무의식의 열쇠를 찾아 떠나는 여정
1) 유영하는 정체성의 변주곡 – 베티와 리타, 다이앤과 카밀라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꿈과 현실, 무의식과 자아의 경계에서 관객을 미로 같은 무의식 속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명료한 줄거리로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죠. 사건은 시간 순대로 흐르지 않고, 갑자기 뜬금없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영화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는 베티와 리타의 이야기로, 할리우드에 꿈을 품고 입성한 베티가 미스테리한 사고를 당한 리타를 만나 일어나는 사건이 중심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푸른 열쇠와 상자가 등장하며 사건은 초현실적 전환점을 맞이하죠. 2부는 다이앤과 카밀라의 이야기로, 녹록지 않은 할리우드 영화 촬영 현장의 현실과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1부와 2부에서 등장인물들은 이름과 배역을 새롭게 부여받습니다. 우리가 한 번의 인생에서 부여받아 사는 이름은 마치 고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존재하는 여러 사회적 맥락에서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갑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 연인과 있을 때, 회사에 있을 때가 모두 다른 것처럼요.
이를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체성을 말합니다. 사회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자아를 보호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기도 하지만, 페르소나와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게 된다면 자아가 분열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해요.
이름과 배역이 뒤섞이고 재배치되는 것은 페르소나가 벗을 수 있는 가면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고정된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욕망들을 자아의 영역으로 꺼낼 수 있도록 자극합니다. 내가 단 하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듯, 현실로 흐르는 욕망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내면을 떠올리게 하며 삶의 역동적인 변화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죠.
2) 무의식의 경계를 지키는 문지기 – 카우보이
영화 중반부, 할리우드 영화감독 애덤은 자신이 연출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주연 배우 캐스팅에 대한 압박을 받습니다. 애덤은 이를 거부하며 저항하지만, 일은 점점 더 꼬이기만 하죠. 영화 산업의 어두운 현실이 심화되면서 애덤은 카우보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카우보이와의 만남은 영화 전반의 장면들과는 다소 독립된 시퀀스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장면입니다. 꺼진 전등이 켜지며 마치 환상처럼 등장한 카우보이는 애덤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생각한 다음에 말하고 있는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라”, “당신이 갖고 있는 태도가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라는 그의 말은 단순히 애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와 연결되며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마치 감독이 직접 등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카우보이의 다소 직접적인 대사는 우리가 얼마나 의식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영화의 이미지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 듯 영화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의 삶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3) 환상의 종착점 – 빨간 방과 실렌시오 극장
멀홀랜드 드라이브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색감이 강한 대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푸른 열쇠와 상자, 몽환적으로 오버랩되는 푸른 빛의 이미지들, 애덤을 압박하는 최후의 남자가 앉아 있는 빨간 방과 실렌시오 극장의 붉은 커튼이 대표적이죠. 특히 빨간 방과 실렌시오 극장은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특수한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빨간 방은 할리우드의 어두운 권력 구조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영화감독 애덤에게 지시를 내리는 최후의 남자가 빨간 방 한 가운데 앉아 마이크를 붙잡고 있죠. 강렬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빨간색은 할리우드 역시 베티가 꿈꾸었던 것처럼 현실의 한계를 넘어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찬 공간이 아니라, 숨겨진 통제와 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이 공존하는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권력과 억압을 떠오르게 합니다.
“No hay banda!” 실렌시오 극장은 “이 곳에 밴드는 없”고, “모든 것은 녹음되어 있다”고 외치는 사회자의 말과 같이 거짓과 환상이 공연되는 곳입니다. 트럼펫을 부는 남자도, 가요를 부르는 여자도 모두 녹음된 테이프에 맞춰 연주하죠. 사회자의 손짓에 맞춰 울리는 사운드들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 혼란을 자아냅니다.
실제로 연주하는 밴드는 없지만 음악 소리가 들리고, 공연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진짜 현실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현실을 마치 자유의지로 직접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 열쇠와 상자에 대해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마저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낡은 담요를 보며 포근한 겨울을 떠올리는가 하면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는 것처럼 일상 속 사물들은 경험의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푸른 열쇠와 상자 역시, 무의식을 여는 열쇠인 동시에 관객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린치의 영화, 그리고 초현실주의 영화들은 현실을 넘어서는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무의식을 직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죠.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줄거리를 따라가며 서사적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미지의 힘을 통해 현실을 넘어선 영역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해 보라고 제안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영화는 관객을 외롭게도 하지만, 어쩌면 감독은 우리를 매혹적인 이미지로 돌진하는 운전석 옆자리에 초대한 것일지도요. 직시하기 두려워 덮어두었던 욕망이나 복잡한 내면의 층위들을 영화를 통해 그리고 꿈을 통해 마음껏 느끼며 탐험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의 감각은 이미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