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으면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게 됩니다. 낮과 밤이 충돌하며 만드는 새로운 빛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죠. 인접한 두 세계가 교차하는 경계에서 탄생하는 새로움은 좋은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일상에 새로움을 더하시나요? 영감이 채워지는 곳은 회사의 모니터 앞일 수도 만화방의 한구석일 수도 한 갤러리의 처음 만난 작가의 작품 앞일 수도 있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으로 잘 알려진 정보라 작가가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 영감을 얻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았습니다.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그리는 정보라 작가가 새로움을 건져 올리는지 귀 기울여 보세요.
슬라브 문학의 환상성으로
현실을 비틀기
정보라 작가는 부커 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작인 『저주 토끼』 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정보라 작가의 책들은 호러, 판타지, SF 등을 넘나들며 인류의 원형적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라 작가의 책이 환상의 세계에만 뿌리내린 것은 아닙니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던 추악한 세계가 사실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서늘해지죠. 그의 책을 보는 순간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무엇인지 금세 이해하게 됩니다.
“저주는 풀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뜨게 할 방법은 없다.”
_『저주 토끼』 , 정보라
정보라 작가의 책에서는 세계 문학의 한 장르가 떠오르곤 하는데요. 바로 슬라브 문학입니다. 슬라브 문학이란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권의 문학을 일컫는 말입니다. 특히 정보라 작가는 스탈린의 폭압이 시작되기 전, 예술이 자유로웠던 시기의 러시아 문학이 추구하는 자유와 환상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미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정보라 작가는 사실 러시아어, 폴란드어, 영어를 구사하는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는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죠. 지금까지 그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포함해 25편이 넘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했습니다.
정보라 작가는 오히려 국내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혹여나 잔상이 남아 표절 문제가 생길까 봐 그렇다고 하죠. 대신 정보라 작가는 여러 언어로 소설을 읽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정보라 작가의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환상 문학 단편선에서 두 편이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죠. 그중 『네순 사프라』는 러시아의 두 작가의 삶을 조합해 지은 소설이라고 합니다. 다른 단편인 『완전한 행복』은 러시아 암흑 시기의 한 사건에서 그 모티프를 얻었다고 하죠. 정보라 작가의 환상성은 오직 직접 읽기를 통해서 느껴집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어떻게 비틀어지는지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그는 쫓기고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쳤다. 앞은 낭떠러지였고 뒤는 검은 허공이었다. 그 검은 허공 속에서 적들이 떼를 지어 쫓아왔다. 그는 뛰었다. 그러나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써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라고 뭔가 폭발했다. 그는 찢어질 듯 밝은 빛 속으로 내던져져 비명과 고통 속에 진저리 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_『아무도 모를 것이다』, Nessun Sapra, 정보라
『저주 토끼』 구매 페이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구매 페이지
데모에서 현실의 공포를
응시하고 배우기
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속에서는 공포가 몸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 <전설의 고향>이나 <무서운 게 딱 좋아!>를 읽고 화장실을 꾹 참았던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현실의 공포를 에너지 있게 그려내는 원천에는 그의 취미가 있습니다. 정보라 작가의 취미는 데모입니다.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현실의 고통을 보고 배운다고 하죠. 정보라 작가는 시위와 집회 참가 기록을 모아 <아무튼, 데모>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 “너의 탓이 아니야.” 추모하는 젊은이들이 또래의 죽음을 애도하며 포스트잇에 이렇게 써서 스크린도어에 붙였다. “너의 탓이 아니야.” “
_『아무튼, 데모』 , 정보라
정보라 작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고통인데요. 그는 ‘삶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고 말합니다. 고통 그 자체인 삶 속에서 정보라 작가가 데모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를 믿기 때문일 겁니다. 정보라 작가가 데모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행진이라고 합니다. 실제 동료들과 함께 땅에 발을 붙이고 걸으면 조금 더 좋은 세상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요. <저주 토끼>의 ‘작가의 말’에서는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븐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라는 담담한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정보라 작가가 소설을 시작하는 마음과 데모에 나가는 마음은 어쩌면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는 이야기에 앞서 자신의 신념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서 밖으로 흐르는 생각이 없다면 한 문단조차 쓸 수 없겠지요. 정보라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신념이 주는 에너지에 매료되고 맙니다. 어딘가 괴이하고 기괴한 이야기 속에도 작가만의 뿌리가 확실하게 느껴지는 덕에 독자들은 안개 같은 이야기 속에서 끝끝내 출구를 찾아내고 말죠. 정보라 작가는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데 슬라브 문학과 데모에서 얻은 영양분을 활용합니다. 덕분에 정보라 작가의 ‘보라 월드’는 단단한 아름드리나무에서 뻗어나가는 가지처럼 유연하고 또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자양분이 되는 영감의 원천을 찾아나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시작이 막막하다면, 정보라 작가의 작품을 펼쳐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