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클릭 몇 번만으로 쉽고 빠르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세상. 바야흐로 콘텐츠 포화 상태에 접어든 디지털 시대에, 기성 매체인 종이 잡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잡지 브랜드가 꼭 잡지만 만들라는 법은 없을 텐데요. 여기, 매거진을 넘어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분야로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두 브랜드가 있습니다. 이들은 전시를 기획하거나 음악 밴드를 주제로 한 의류 컬렉션을 선보이고, 때로는 비주얼 아트를 일상의 사물 위에 펼쳐내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죠. 창의적인 도전 정신으로 잡지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매거진 032c와 Toiletpaper를 소개합니다.
032c
강렬하고 쨍한 붉은 컬러와 모던 디자인의 상징인 ‘Helvetica’를 연상시키는 볼드한 서체는 멀리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요르그 코흐가 2000년 베를린에서 설립한 032c는 패션과 예술, 정치를 다루는 컨템포러리 매거진으로 시작했습니다. ‘032c’라는 이름은 팬톤(PANTONE)사의 빨간색 표기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하죠.
기존 잡지 문법을 따르지 않는 실험적인 디자인과 파격적인 레이아웃은 출간과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당시 베를린은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패션 산업도 점차 성장하고 있었기에, 032c는 주류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 압력 없이 독창적인 정체성을 지키며 과감한 시도를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혁신적인 행보를 인정받으며 잔혹한 우아함의 미학을 전파한다고 평가받았고, 2006년에는 독일의 권위 있는 시상식 Lead Awards에서 매거진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죠.
“콘텐츠의 시대에는 단순히 잡지나 온라인 기사를 작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콘텐츠 제작을 넘어 문화적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이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구성해야 하죠. 때로는 티셔츠가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데 더 직관적이고 강력한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_Thom Bettridge, 032c 매니징 에디터
032c의 모든 창작물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극하고, 상상력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유와 창의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헬무트 랑이나 라프 시몬스 등 심도있는 아티스트 인터뷰로 콘텐츠 내실을 다졌고, 2018년에는 질샌더와 프라다에서 경력을 쌓은 디자이너인 아내 마리아 코흐와 함께 기성복 컬렉션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패션 브랜드로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올해 초에는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처음으로 올라 런웨이를 선보이기도 했죠.
이들의 대담한 시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데요. 기존에 매거진으로 협업한 아티스트의 설치 미술을 매장에 전시하거나, 자체 갤러리를 오픈해 현대 미술 작품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브랜드와도 협업도 활발한데요. 스투시와의 콜라보 티셔츠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새겨 패션과 문학을 결합했죠.
올해 4월에는 성수동에 첫 번째 글로벌 스토어이자 복합문화공간인 ‘032c 갤러리 서울’을 오픈했는데요. 의류 컬렉션부터 비디오 설치 작품까지 한자리에 선보이며 매거진 콘텐츠를 오프라인에 입체적으로 구현했습니다. 동시대 매거진이 꿈꾸는 무한한 가능성은 032c를 통해 생생한 현실이 됩니다.
WEBSITE : 032c
INSTAGRAM : @032c
Toiletpaper
‘화장실 휴지’라는 브랜드 이름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토일렛페이퍼는(Toiletpaper)는 2010년 이탈리아에서 창간된 독립 잡지이자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입니다. ‘1억 5천만 원짜리 바나나’로 화제가 된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사진작가 피에르 파올로 페라리가 설립해 듀오로 활동하고 있죠.
“우리는 항상 사랑이나 탐욕처럼 보편적인 주제로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마치 화가가 캔버스에서 작업하듯 여러 겹을 쌓아가며 구성해 나가고, 결국에는 예상치 못한 곳에 도달하게 되죠. 최고의 이미지는 즉흥적인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토일렛페이퍼만의 이미지를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향수를 증류하듯 말이죠.”
_Maurizio Cattelan, Toiletpaper 공동 설립자
평소 흔하게 사용하는 휴지처럼, 토일렛페이퍼는 누구나 쉽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잡지를 의도했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글과 광고 없이 순수 이미지로만 지면을 채웠죠. 얇고 커다란 진(zine) 형태의 잡지를 펼치면 팝아트처럼 통통 튀는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펼쳐지는데요. 사람 눈동자가 달린 아름답고도 오싹한 장미꽃, 햄버거 빵 사이에 들어간 개구리, 한입 베어 물은 비누 등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오가는 초현실적인 사진들이 등장합니다. 익숙한 사물과 존재를 낯설게 조합하고 해체하면서 탄생한 세계는 풍자적이면서도 유쾌한 긴장감을 자아내죠.
토일렛페이퍼는 잡지를 넘어 광고, 전시, 라이프스타일 분야까지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데요. 특유의 감각적이고 화려한 비주얼을 기반으로 패션이나 가구 제품을 선보이고, 최근에는 자체 뷰티 브랜드까지 출시했습니다. 다채로운 에너지가 돋보이는 협업 또한 주목할 지점인데요. 명품 브랜드 KENZO를 감각적으로 탈바꿈하며 브랜딩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나이키와의 콜라보로 대중 브랜드에 예술을 한 스푼 끼얹기도 했죠. 작년에는 삼성전자와 협업한 한정판 냉장고를 선보이며 가전제품 분야까지 뛰어들었습니다. 상업 프로젝트에서도 열정적이고 도발적인 예술 실험은 한계 없이 계속되죠. 토일렛페이퍼의 발칙한 상상력이 예술을 얼마나 더 멀리 데려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WEBISTE : Toiletpaper
INSTAGRAM : @toiletpapermagazineofficial
21세기는 이미 경계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콘텐츠 소비자가 창작자가 되고, 가상의 디지털 세상에서도 우리는 현실처럼 이야기를 나누곤 하니까요. 마치 매거진이 패션 브랜드가 되고 때로는 예술 갤러리로 변신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동안 사회가 말하는 정답과 고정관념에 갇혀 스스로의 가능성을 섣불리 규정짓고 있지는 않았나요? 길을 잃기 쉬운 번잡한 세상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창조적으로 길을 개척하는 두 브랜드처럼, 용기 있게 경계 밖으로 나아가는 순간 비로소 나만의 고유한 세계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