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이 밝았습니다. 진부하지만 우리는 늘 신년 계획을 세웁니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올 한 해는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점검하는 리추얼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는 의식은 어느새 현재 자신이 맡은 역할을 살피는 계기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와 가족, 나와 연인, 나와 친구, 나와 사회라는 관계 속에서. 결국 삶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부여하는 역할로 점철된 것이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지는 이 시기에 주변 관계와 역할을 톺아보기에 좋은 매개가 될 그림책을 소개하며 여러분의 리추얼을 도와봅니다.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네 인물의 우연한 동행이 관계의 필연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외로운 한 소년이 두더지를 만나고 차례대로 여우를, 말을 마주하며 삶의 여정에 오르죠.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 상처가 많아 경계심이 크고 여린 여우, 큰 몸집으로 이들을 품는 말은 저마다 다르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태도로 서로 견고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이런저런 삶의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소년이 묻고 두더지, 여우, 말과 대화하는 과정은 관계의 의미에 깊이를 더합니다. 홀로였던 소년이 소박한 우정의 언어를 곁에 두면서 점차 자신을, 삶을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하는데요. 윤리적인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방식이 아닌, 같은 걸음으로 호흡하며 깨달음을 나누는 방식이기에 더욱 진실한 벗들의 세계. 가까운 관계가 주는 행복을 상기하고 싶다면 꼭 접해보시길 바랍니다.
다비드 칼리·모니카 바렌고,
『사랑의 모양』
반대로 우리는 관계로 인해 아프기도 합니다. 『사랑의 모양』에 등장하는 여자는 정원에 피어난 이름 모를 하얀 꽃에 반해 온종일 마음을 쏟습니다. 날마다 물을 주고 흙을 고르며 매일 새로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런데 곧 발화를 멈추고 피어 있던 꽃들마저 시들기 시작하자 여자는 이내 슬픔에 빠지고 괴로움 끝에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아름다움은 왜 사라져버리는 걸까. 무언가를 망치는 사랑도 있는 걸까?’
“사랑이 널 기쁘게 한다면 그건 네가 무엇을 주어서도, 무엇을 돌려받아서도 아니야. 단지 지금, 사랑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
_다비드 칼리·모니카 바렌고, 『사랑의 모양』
어디선가 들려온 응답의 의미는,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피어난 그러나 이번엔 자신의 정원이 아닌 이웃집 정원에서 움터 ‘가질 수 없지만 함께인 꽃’이 되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이해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상을 소유하거나 관계를 강요하지는 않는지, 역할이라는 굴레에 가두고 마땅한 소임을 지나치게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대상이 생동하고 스러지기를 그저 인정해주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한 존재가 세상에서 맡은 역할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일지도요.
이영리,
『Holiday』
너와 나라는 개인이 하나하나 모이면 나와 사회라는 집단적 실체와의 상호작용을 낳기도 하죠. 『Holiday』는 나와 사회의 관계성에서 고민해볼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찰하도록 합니다. 바로 회전목마라는 도구를 통해서 말입니다. 회전목마는 놀이공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이자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기구가 아니던가요. 그러다 문득 회전목마에 한 의문이 제기되었네요. ‘회전목마의 목마들은 왜 동물일까?’
인간은 오랜 과거부터 동물을 탔습니다. ‘탄다’는 행위에는 사실 은근한 권력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타는 대상을 사물로 여겨야 하는 것. 동등함이 배제된 이런 위계질서를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인간과 기꺼이 회전목마가 되는 동물의 차등적 역할 관계는 우리 사회에 역시 녹아있는지도 모릅니다. 탄다는 행위 밖에도 어떤 행위가 내포하는 ‘당연한 차별’에 대해, 일상의 ‘권력’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환상성 뒤에 숨은 냉혹한 세계의 모순을 몇 마디 말 대신 이미지로 전하는 힘을 가진 작품인 한편 오브제로서 세워두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점이 독특하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일상의 안녕과 안전을 바라게 되는 요즘, 가까운 이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안팎으로 흔들리는 계절이지만 여러분의 마음만은 기울지 않기를 바라며 추천 그림책들을 통해 우정, 사랑, 친절, 다정, 용기, 포용, 평등의 언어와 이미지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