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을 더 이상 한류 ‘현상’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세계화된 요즘입니다. 북미 팝스타가 한국 아이돌에서 영감을 받고 대중은 트렌디한 것을 열망 할 때 케이팝을 살피곤 하죠. 이 장르가 이국적이거나 낯선 것에서 벗어난 지는 너무 오래 돼버린 듯합니다.
케이팝의 성공적인 세계화 안착 비결을 분석하자면 수많은 요인이 차고 넘치지만, 필자는 대형 기획사의 거대 자본과 선구적 안목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음악 시장이 크고 잠재 수요가 높은 북미와 일본을 필두로 한 적극적인 벤치마킹과 현지화, 특히 그곳의 인재를 직접 영입해 창작물을 의뢰한 제작 방식 말이죠. 오늘은 케이팝의 필수 요소인 ‘안무’를 중심으로, 거대 왕국 ‘SM 엔터테인먼트’가 얼마나 발 빠르고 영리하게 신문물을 활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래의 K-Pop에는
해외 인재가 필요하다
보이 그룹 H.O.T로 한국 아이돌 역사의 첫 획을 긋고, 연습생 시스템을 제도화해 양질의 아티스트를 대거 배출하는 데 앞장 선 SM 엔터테인먼트(이하 SM). JYP, YG를 포함한 3대 대형 기획사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특히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집중 공략해 일찍이 한류를 선도한 곳이기도 하죠. 유행을 감지하는 민첩한 감각과 과감한 투자가 비결이었습니다.
특히 안목이 국내에만 갇힐 수 있다는 한계를 경계해 해외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했습니다. 2009년부터 시작한 ‘송 캠프’를 예로 들 수 있는데요. 북미와 유럽, 아시아 등 다국적 작곡가들을 한 자리에 초청해 일정 기간동안 함께 곡을 쓰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멜로디, 반주, 편곡을 맡은 이가 모두 다를 만큼 열띤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은 독창적인 개성과 신선한 멜로디로 SM의 다음 트렌드가 되곤 하죠. 내수 시장에만 ‘고이지 않겠다’는 SM의 야심차고도 영리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이 같은 시도는 비단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케이팝의 대중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 댄스. 안무 창작자 또한 해외 전문 인력을 초빙한 것인데요. 예술성이 가미된 고품질의 안무는 케이팝의 전반적인 수준을 높이고 아이돌을 아티스트 단계로 격상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해외 안무가 협업과 국내 댄서 레벨이 전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진 지금, 그 기반을 다지고 힘을 실어주었던 SM의 대표적인 해외 안무가들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리노 나카소네
(Rino Nakasone)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 (Replay)’로 케이팝과 인연을 맺은 리노 나카소네는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안무가입니다. 1979년생으로 11살 때 영화 <문워커>를 통해 마이클 잭슨에 빠지고 14살 때 그의 도쿄 투어 무대를 본 뒤, 19살 미국 LA로 날아가 댄스 유학을 시작하죠. 이후 자넷 잭슨과 브리트니 스피어스, 그웬 스테파니 등 유명 팝스타의 댄서로 활동합니다. 2008년, 유튜브에서 그녀의 춤을 본 SM 관계자가 첫 안무를 의뢰한 뒤 동방신기의 ‘왜’와 ‘Maximum’, f(x)의 ‘NU ABO’와 보아의 ‘Copy&Paste’ 등, 그리고 NCT 127의 콘서트 연출까지 현재에도 꾸준히 SM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샤이니 ‘누난 너무 예뻐 (Replay)’
작고 마른 체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굵직한 선과 날렵함. 동작이 변형되는 범주가 커 짧은 순간에도 다이나믹합니다.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듯 역동적이고 부드러운 움직임입니다. 데뷔곡 ‘누난 너무 예뻐 (Replay)’를 시작으로, 어떤 음악에도 박자가 맞는다며 ‘마법의 안무’라 불렸던 ‘산소 같은 너’, 심재원 안무가와 공동 작업했던 ‘Lucifer’까지. 샤이니란 그룹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함께 했던 핵심 제작자 중 한 명인 셈입니다.
여담으로 그녀는 대부분의 가수는 안무가의 원본 버전이 어려워 난이도를 대폭 낮추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안무를 수정없이 원본 그대로 수행한 가수는 샤이니가 처음이었다며 가장 인상 깊은 아티스트로 꼽기도 했습니다.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Genie)’
파워풀한 스타일에 보이그룹만 담당할 것 같지만 사실 리노는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Genie)’를 창작하기도 했습니다다. 높은 하이힐에 맨 다리를 드러내며 아찔함을 강조했던 소녀시대와 달리, 기관차처럼 거센 동력으로 달려 나가는 원본이 생소하고도 매력적입니다. 원작자와 수행자, 안무가와 아티스트의 대비를 엿보는 것도 케이팝 댄스를 즐기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토니 테스타
(Tony Testa)
실험적인 스타일과 입체적인 동선이 돋보이는 토니 테스타는 SM의 전속 계약을 맺은 1987년생 미국 안무가입니다.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18살에 LA로 이주한 뒤, 각종 영화와 공연 분야에서 안무가이자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탭 댄스, 발레, 재즈, 현대무용, 플라멩코, 부토(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일본에서 발생한 현대무용의 한 종류), 스트릿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단련했는데요. 이런 인사이트로 케이팝을 신선하고 이국적인 시점으로 분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샤이니의 ‘Sherlock•셜록 (Clue + Note)’과 동방신기의 ‘Something’, 엑소의 ‘중독 (Overdose)’, 소녀시대의 ‘Lion Heart’ 등을 담당했습니다.
엑소 ‘늑대와 미녀 (Wolf)’
그의 안무는 늘 비일상적인 조형물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의 나무’라 불렸던 엑소의 ‘늑대와 미녀’ 오프닝을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십여 명의 멤버가 한 줄로 겹쳐 서 제각기 다른 곳으로 팔을 뻗으면 울창하고 빽빽한 나무의 형상이 보여집니다. 박자에 맞춰 꿈틀거리는 나뭇가지가 괴기할 정도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순수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토니 테스타의 이력이 이런 곳에서 보여집니다.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안무 설치 작품을 전시하거나, 그리스의 시각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 독일의 전설적인 현대 무용수 피나 바우쉬(Pina Baush) 무용단에서 무급 연수생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안무를 시각 예술의 영역으로 넓히고자 했습니다.
동방신기 ‘Catch Me’
한때 SM의 가장 값비싼 안무로 불렸던 동방신기의 ‘Catch Me’도 그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두 개의 자아, 그 이중성의 충돌을 ‘거울’이란 키워드로 대칭시켰습니다. 이별의 아픔에 이성을 잃고 분노하는 화자의 감정은 ‘헐크’로 표현했습니다. 댄서들에게 ‘화(anger)’라는 역할을 부여해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결국 거대한 팔뚝을 만들어 격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서사를 부여하며 안무를 음악의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독립적인 창작의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카일 하나가미
(Kyle Hanagami)
벌써 40여 개의 케이팝 안무를 창작한 카일 하나가미는 1986년생의 LA 출신 일본계 미국인 안무가입니다. 2010년대 이미 어반댄스 계에서 명성을 떨친 스타 안무가였지만 최근 십 년 간은 무섭도록 많은 양의 케이팝 댄스를 담당하고 있죠. 버클리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중 재미로 봤던 힙합 팀 오디션에 합격했고, 이후로 쭉 춤 외길 인생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뉴이스트의 ‘Face’, 애프터 스쿨의 ‘Flashback’으로 케이팝 시장에 얼굴을 알린 뒤, 레드 벨벳의 ‘Ice Cream Cake’, ‘러시안 룰렛’, ‘빨간 맛’, 티파니의 ‘I Just Wanna Dance’, 갓 더 비트의 ‘Step Back’ 등 걸그룹 춤을 전문적으로 작업했습니다.
f(x) ‘4 Walls’
가볍고, 살랑거립니다. 디테일이 많지만 포인트 구간은 확실하게 살립니다. 실험적인 사운드가 많은 케이팝을 영리하게 이해하고 시각화합니다. 난해한 컨셉을 몽환적으로 완성시켜 f(x)의 역작 중 하나로 꼽히는 ‘4 Walls’ 또한 카일의 안무였습니다.
그의 댄서 정체성에선 유튜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현 시점 무려 493만명의 구독자, 최고 2.4억회의 조회수 기록을 갖고 있는 대형 유튜버인데요. 유튜브 초창기부터 꾸준히 영상을 업로드했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했지만, 성공의 비결을 뽑자면 오로지 춤의 퀄리티일 것입니다. 마치 음악을 눈으로 보는 듯, 노래와 찰떡처럼 어울리는 안무가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블랙핑크 ‘Ice Cream’
사실 최근 그는 스스로를 블랙핑크의 안무가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붐바야 (BOOMBAYAH)’, ‘뚜두뚜두 (DDU-DU DDU-DU)’ ‘Kill This Love’,’How You Like That’ 등 데뷔 때부터 전속 안무가로 함께했고, 북미에서의 입지가 훨씬 높기 때문이죠. 다만 소속사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것은 여성의 몸 선을 잘 알고 가장 아름다운 결을 만들어내는 그의 안무 능력입니다. 발랄하지만 거칠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걸그룹 댄스를 창작하는 데 최적화된 안무가이죠.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아이돌 ‘소속사’보단 ‘기획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행을 읽고 대중에 공감하며 발 빠르게 ‘판’을 짜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SM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트렌드세터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을 타겟으로 잡는 넓은 시야와 새로운 인적 자원에 대한 과감한 투자. 예측할 수 없는 손실에 대한 대비는 고품질의 창작물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 곳이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해외 유명 안무가 초빙이라는 사업 아이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층 예술적인 안무를 통해 케이팝이 고도화된 과정, SM과 안무 창작자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