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재미있게 놀지 못한다는 뜻이야.”
영화 <블루 발렌타인>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주인공 딘이 자신의 아내 신디에게 장난을 쳐도 받아주지 않자 집을 나서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지요. 새해가 밝았고, 우리는 한 살의 나이를 먹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에 대한 무게가 늘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각자 부여받은 다양한 역할을 통해 사회를 꾸려나갑니다.
새해를 맞아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저는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문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건축사 윤리선언서에는 사회공동체의 삶의 향상, 공공사회 발전 등의 문구를 통해 사회적 역할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작은 주택 하나를 짓더라도 도시라는 공공의 장소에는 많은 변화가 발생할 수 있기에 이러한 사명감이 필요하지요. 건축가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노력은 비단 건물을 설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건축적인 철학과 개념을 책에 담아 출판하여 대중과 지속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건축가도 있지요. 건축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책 3권을 소개합니다.
『도시논객』
“존재 가치를 규명하는 첫 문장을 만들려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국회의사당이 무엇이고, 학교가 무엇이고, 도서관이 무엇인가. 이에 대답하고 문장으로 서술하려면 역사에 대한 성찰과 사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축은 인문학으로 출발해서 공학으로 완성되며 예술작품으로 남기를 열망하는 작업이다.”
_『도시논객』 202p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자 건축가인 서현은 다양한 건축작업과 더불어 건축교육에도 힘쓰고 있는 인물입니다. 특히 활발한 출판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작가이기도 하지요. 『도시논객』은 그의 많은 저서 중에서 가장 최근에 출판된 신작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하게 마주하는 사회현상을 건축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인문학 서적입니다. 교육, 결혼, 심지어 동창회와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건축을 통해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용이지요. 종종 등장하는 정치, 역사와 같은 무거운 주제도, 짧은 호흡과 재치있는 표현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도시의 관찰자가 되어 목격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현상에 대해 다시금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줍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
“단지형 아파트의 경우 내부 환경은 좋을지 몰라도 거리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다. [……] 거리형 아파트는 물론 장단점이 이와 반대다. 길에 면하여 지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층부가 상가가 되고 결과적으로 가로의 활력에 기여한다. 물론 안팎으로 조경이 잘된 단지형 아파트 역시 거리를 좋게 만들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가로의 중요성은 도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항목이다. 무엇보다 거리형 아파트는 고립되지 않은 도시의 일원으로 작동한다. 상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로 위에 거주함으로써 직주근접의 삶을 실현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_『가장 도시적인 삶』 85p
작가인 황두진은 서촌에서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가이자 다수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그는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건축이론을 제시하며 더 좋은 도시를 위해 필요한 개념임을 주장합니다. 다양한 색상이 층층이 쌓인 무지개떡의 구성처럼 도시에도 다양한 용도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고밀도의 저층주거가 중요하다는 내용이지요. 이러한 건축유형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거리는 더욱 활력이 넘치고, 개인은 한 건물에서 주거와 업무를 해결하는 직주근접의 생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은 이러한 ‘무지개떡 건축’의 기원이 되는 오래된 상가아파트에 주목합니다. 서울 구도심의 상가아파트를 직접 답사를 진행하고 입지, 규모, 복합, 보행, 형태의 다섯 가지 기준을 통해 각각의 건물을 분석한 책입니다. 이와 더불어 해당 건물과 도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진 구성으로 비전문가인 일반인도 읽기에 적합하지요. 또한, 건축계에서 상가아파트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는데, 이 책은 대한민국 주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가아파트에 대한 기초자료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의 의의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종종 마주하는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그의 애정어린 시선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서울의 구석구석을 함께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부부 건축가 생존기, 그래도 건축』
“나는 공공 건축이야말로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라고 생각한다. 잘 만들어진 공공 건축물은 문화를 바꾸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좋은 설계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작업의 과정을 존중해주는 1퍼센트의 비율이 10퍼센트를 넘어 100퍼센트가 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_『부부 건축가 생존기, 그래도 건축』79p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 전보림과 이승환은 부부건축가입니다. 이 둘은 아이디알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활발한 건축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건축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지며, 이에 대한 글쓰기를 블로그를 통해 대중과 지속적인 소통을 하고있지요.
이 책도 블로그의 글처럼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키워드를 ‘불만’이라고 말한바 있는것처럼 부당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주를 이룹니다. 비합리적인 행정적 절차나 제도 등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들이 추구하는 좋은 건축을 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상세하기 기록된 책이지요. 특히, 가감없는 표현에서는 건축에 대한 그들의 진정성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건축가의 숨겨진 일상과 노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3요소인 의식주에서 ‘주’는 ‘집 주(宙)’가 아닌 ‘살 주(住)’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닌 삶을 담아내는 집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건축은 기술적인 것을 넘어 인문학, 철학, 미학 등 다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지요.
건축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미술관에서도 건축가에 대한 기획전시의 빈도가 부쩍 늘어난 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건축을 하나의 문화 혹은 예술로 바라보는 경향은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 건축가들의 출판활동도 한몫을 하고 있지요. 새해를 맞아 소개해 드린 책을 읽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를 꿈꾸는 건축가들의 시선을 경험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