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주요 목적과 콘텐츠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요. 고대 그리스에 정치적 논의를 위해 모였던 장소, 아고라 광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공간은 언제나 공동체의 중심에서 문화와 가치, 소통의 장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렇듯 공간은 개인을 넘어 집단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지역의 역사, 지리적 배경과 어우러져 공간이 지닌 사회적인 역할을 담당한 공간을 소개합니다. 지역의 역사를 후원하며 상생하는 ‘강릉 선교장’, 독서 문화와 함께 지역 공동체를 확산시키는 ‘인제 기적의 도서관’, 농촌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는 ‘진천 뤁스퀘어’ 입니다. 이들을 통해 공간이 지닌 기본적 역할과 더불어, 왜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지 의미를 따라가볼게요.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은 조선시대 많은 예술가들이 모였던 공간입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인데요. 당시 금강산은 많은 시인, 화가, 선비들에게 예술적 영감이 되어 살면서 꼭 방문해보고 싶은 명승지로 여겨졌습니다. 마침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강릉 선교장이 있었고, 후한 대접 덕분에 여행자들이 오래 머물렀다고 해요.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형님 효령대군 집안이 터를 잡아 지어졌습니다. 당시엔 대문 앞까지 경포 호수가 닿아서 배를 타고 들어와야 했습니다. 때문에 경포호를 배다리로 만들어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선교장(배 선, 다리 교) 입니다.
지역의 역사를 후원하며 상생하는 공간
선교장 집안은 조선부터 현재까지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며 나누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나누지 않으면 하늘에서 나눈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과 재산을 나누며 상생했습니다. 가뭄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들렸던 여행자들에게 음식, 옷, 머무를 공간, 심지어 노잣돈까지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씩 길게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치관은 일제 강점기에 국가적으로도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의 선대는 교육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강릉 최초의 근대학교 ‘동진학교’를 세웠습니다. 많은 독립 운동가가 동진학교에 출강해 국어, 수학, 한문, 영어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을 후원하며 김구 선생님께 독립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님께서 감사의 표시로 직접 쓴 글자 세 점을 선교장에 선물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지역의 역사를 보존하고 후원하는 역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교장 내부 박물관에는 300년 동안 소장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태극기, 광해군 하사 말 안장, 추사 김정희의 현판, 조선시대 다기와 가구류 등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경험을 대접하기 위한 행사도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전문 오르가니스트의 연주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선교장 본채에 설치된 오르간을 통해 클래식, 재즈, 영화 OST 등 다양한 장르 프로그램을 연주합니다. 연주 중간엔 자연과 새 소리가 곁들여지기도 합니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웅장한 오르간 소리, 열화당 뒤로 펼쳐진 소나무 경치가 어우러져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주소 : 강원 강릉시 운정길 63 선교장
인제 기적의 도서관
인제는 넓은 산세와 길게 이어진 강을 지니고 있어 한적한 분위기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역입니다. 하지만 지리적 특성 상 산악지대에 둘러싸여 있어 문화적 접근성과 교육의 기회가 비교적 제한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인구 3만 명 도시에 일 년 만에 10만 명이 방문한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독특한 건축 디자인과 주민들에게 개방적인 공간 이용성까지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며 단순한 도서관 이상의 가치를 제공합니다.
독서 문화와 공동체를 확산시키는 공간
이곳은 개관 한지 일 년 만에 10만 명이 방문하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인제군의 인구 수가 약 3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지역을 방문하는 주요 목적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 도서관을 보기 위해 인제에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도착지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길의 모습까지 매력을 더해주며 지역 방문의 의미를 심어줍니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넓게 펼쳐진 드넓은 산세를 지나 천혜의 자연을 감상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지나온 풍경과 어우러지는 첫인상을 느낄 수 있는데요. 인제가 가진 지리적, 환경적 요소를 깊게 고민하고 이해한 듯한 건축가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천혜의 자연을 담은 하늘 내린 인제’라는 슬로건처럼 이 도서관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도서관의 틀을 벗어나, 원형으로 디자인 된 독특한 외관과 높은 층고로 지어졌습니다. 이 원형 구조는 닫혀 있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데요. 어린 아이부터 어른, 군인 등 모든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의미를 전합니다. 또한 원형의 중심 구조를 통해 도서관이 지역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를 가집니다.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시간을 넘어 무한한 상상’이란 슬로건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어울리게 내부로 들어가면 높은 층고와 탁 트인 창문으로 개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장이 높을수록 상상력과 창의력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것처럼 높은 층고는 무한한 상상을 강조한 도서관의 슬로건에 어울립니다. 실제로 방문했을 당시 오후 4시가 넘어 천장의 인공 조명을 켜기 전에도 밝은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요.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만으로도 공간을 밝히기에 충분합니다. 목재와 유리의 조화를 통해 따뜻한 분위기를 더하고, 벽과 천장까지 큰 창문이 나있어 주변 자연 풍경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곡선의 모양과 자연적 소재를 적극 활용하며 사람과 자연, 공간이 어우러진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도서관의 건축적 매력은 공간에서 운영되는 콘텐츠, 프로그램과 연결됩니다. 도서관의 원형 디자인으로 된 중앙 공간에서 도서 강연, 지역 행사들이 활발하게 열립니다. 독서 워크숍, 독서 클럽, 작가 초청 강연, 북콘서트 등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지역 주민들에게 경험할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책을 매개로 소통하고 지식을 나누면서, 이 공간은 책을 대여하는 도서관 이상으로 지역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소 : 강원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140번길 52-7
진천 뤁스퀘어
‘농촌에 맞는 문화공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뤁스퀘어가 시작되었습니다. 농촌의 공간에서 농업이라는 산업을 문화적으로 경험하는 요소를 고려해 기획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뤁스퀘어는 농촌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적 요소와 농업의 혁신적인 기술을 경험하는 물리적 요소,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체험하는 것들이 결합하여 지역과 사람을 잇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농촌 문화를 체험하는 복합문화공간
뤁스퀘어는 농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농촌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을 살린 건축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형 구조와 따뜻한 목재 사용은 건물 자체가 지역의 환경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줍니다. 내부 정원인 스템가든은 습지식물, 이끼, 돌과 흐르는 물 등이 바깥 풍경과 이어진 것처럼 조경되어 있습니다. 넓은 창문은 환기와 채광을 도우며 사람과 식물들에게 모두 이로운 영향을 줍니다.
공간의 내부는 방문객과 지역 주민들이 다양한 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유연한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레스토랑, 카페를 방문한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이면서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이용되는데요. 전시, 공연, 클래스, 결혼식까지 농촌에서 부족한 문화시설을 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자연과 농촌을 모티브로 하는 공간은 꽤 많지만 그중에서도 뤁스퀘어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22년 하우스비전 전람회를 통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진천에 왔습니다. 지금은 일부를 스테이로 개방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예약하고 방문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방문객들은 농촌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고, 스테이 앞의 텃밭과 스마트팜으로 재배된 농산물을 먹고, 농업을 주제로 건축된 집에 머무릅니다. 이렇게 농촌의 새로운 매력을 전달하며 농촌과 현대 문화를 잇는 다리이자,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공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주소 : 충북 진천군 이월면 진광로 928-27 뤁스퀘어
공간은 단순히 사람들이 머무르는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교류하고 성장하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강릉 선교장, 인제 기적의 도서관, 진천 뤁스퀘어는 각각의 독특한 방식으로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며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역 사회에 필요한 공간의 역할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곳을 통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이곳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도 실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용기와 울림을 줍니다. 이런 공간이 늘어날수록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을 연결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키워갈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도 이런 공간이 있다면, 자주 방문하고 참여해 보세요. 그리고 그런 공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유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연결될 수 있는 사회와 공간을 함께 그려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