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상업 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는 여러 인력이 작용합니다. 때로 일정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해야 하는 브랜드의 역할과 마치 프리즘처럼 브랜드를 다채롭게 해석하는 공간 디자이너의 역할이 충돌하기도 하죠. 브랜드의 힘이 강한 경우 엄격한 가이드라인 아래에 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가진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반대로 디자이너의 힘이 강하다면 브랜드는 더 넓은 영역으로 뻗어나가 새로운 개성을 획득합니다. 브랜드와 디자이너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공간의 성격과 모양새를 결정짓습니다. 협업이 가깝고 긴밀할수록 공간의 정체성은 더 뾰족해지고요. ‘커피계의 애플’이라고도 불리는 블루보틀은 미니멀리즘 철학과 푸른색 로고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형성했는데요. 반면 블루보틀의 공간에는 마치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마감재도, 공간의 구조도, 연상하는 이미지도 다릅니다. 블루보틀의 푸른 로고만 남겨놓고 말이죠. 높은 자유도를 토대로 다양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블루보틀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풀이를 내놓았습니다. 5곳의 디자인 스튜디오가 설계한 국내 블루보틀 공간을 만나보세요.
스키마타 아키텍트(조 나가사카),
성수와 삼청


국내 블루보틀 1호점과 2호점은 일본의 건축 디자인 회사 스키마타 아키텍트(Schemata Architects)의 조 나가사카(Jo Nagasaka)가 맡았습니다. 각각 성수와 삼청에 자리를 잡았는데요. 성수와 삼청이라는 지역의 색깔만큼이나 공간의 특성도 서로 다릅니다. 붉은 벽돌과 콘크리트, 스테인리스 스틸로 공장 지대의 분위기를 강조한 성수와 달리 삼청은 한옥과의 연결성을 강조합니다. 2층의 정면 창은 한옥의 지붕을 바라보도록 설계했고, 3층의 창으로는 북악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죠. 성수가 지하로, 내부로 향하는 공간이라면 삼청은 바깥으로, 풍경으로 향하는 공간입니다.


지역성을 공간에 녹여내는 디자이너인 조 나가사카는 이미 일본의 많은 블루보틀과 이솝 매장을 디자인한 경험이 있는데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컨셉을 적용하고, 기존의 것을 허무는 대신 개조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조 나가사카가 설계한 블루보틀에 공통점이 있다면 공간의 비움과 미완성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성수점의 1층을 비워 지하에 자연광을 들여오거나, 건물의 기존 마감을 그대로 남겨 미완성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는 조 나가사카가 공간이 디자이너의 의도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브랜드와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채워서 완성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태오양 스튜디오(양태오),
명동

양태오 디자이너는 명동의 지역성을 전통적인 컨셉으로 해석하고 역동적인 스토리를 부여했습니다. ‘명례방(明禮坊)’이라는 조선시대의 지명을 활용해 명동의 역사적인 측면을 집어내고, 집이 스스로 경치가 되는 한옥의 특징인 ‘자경(自景)’을 컨셉으로 삼았는데요. 도예가 김덕호, 이인화와 협업해 명패와 도자기 로고를 제작한 점에서도 한국적 미학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의 개성이 잘 드러납니다.



명동 블루보틀을 설계한 양태오 디자이너는 전통적인 모티브를 통해 블루보틀을 명동의 빠른 속도감에 대비되는 휴식의 공간으로 해석했는데요. 상공간이 아닌 집에 가까운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블루하우스’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공간의 진면목은 블루의 활용에서 잘 드러납니다. 블루 컬러를 로고 등의 일부 요소에서 활용하는 다른 블루보틀 매장과 달리 내부 전체가 푸른 빛으로 번쩍이는데요. 푸른 조명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반사광을 만들어 독특한 블루하우스만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블루의 내부 공간은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흰 파사드와 조화되며 공간 전체가 블루보틀의 로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편, 명동점은 좌석이 없는 테이크아웃 카페로, 국내에서 가장 작은 규모로 설계된 블루보틀인데요. 작은 규모를 좁고 높은 파사드와 대형 로고 사이니지로 보완합니다.
유랩 디자인 스튜디오,
판교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은 블루보틀을 한국의 순백으로 해석했습니다. 마치 달항아리처럼 고요하고 차분한 백색을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요. 수작업으로 가마에 구운 백색 세라믹 타일은 유랩에서 정의한 블루보틀의 정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타일의 입체감과 백색은 빛과 질감을 잘 드러내는 요소인데요. 시시때때로 빛의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공간이 위치한 판교는 IT 회사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인데요. 그 속에서 블루보틀이 디지털과 대비되는 고요한 사색의 공간으로 기능하길 의도했습니다.

여백과 질서는 유랩에서 해석한 블루보틀의 또 다른 키워드인데요. 배경처럼 비어 있는 공간은 여유와 조화를 나타내고, 타일이나 목재가 반복적으로 적층된 구조는 가지런한 질서감을 형성합니다. 특히 2층의 테이블은 각목을 층층이 쌓아 올려 제작했는데요. 테이블의 측면을 바라보았을 때 자연스러운 질서감이 느껴집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에 가까운 미학으로 공간을 편안하게 구성하려는 시도가 엿보입니다.
팀바이럴스(문승지),
연남과 제주



팀바이럴스(TeamVirals)는 블루보틀 연남에 서정적인 골목길을 들여왔습니다. 담벼락과 계단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처럼 공간을 구성했는데요.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도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연남동의 옛 골목길을 블루보틀에 투영했습니다. 밀도감을 높이는 오밀조밀한 타일 패턴, 바닥과 벽의 경계를 지우는 연속적인 마감재의 사용이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낮은 천장고의 단점마저 보완합니다. 천장의 파이프라인과 창 밖 경의선 숲길로 향하는 평상 형태의 가구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합니다.

제주 구좌읍에 위치한 블루보틀에는 제주만의 골목길을 담았습니다. 특히 제주 출신인 문승지 디렉터를 중심으로 오랜 풍습을 공간에 녹여냈는데요. 집의 입구인 ‘정낭’과 마을의 광장이자 사랑방인 ‘퐁낭’을 공간 곳곳에 활용했습니다. 정낭은 대문 대신에 세 개의 기둥을 걸쳐 집에 사람이 있는지 표시하는 제주만의 조형물인데요. 정낭의 조형적 구조를 입구와 카운터 동선, 가구에 적용해 환대의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동시에 ‘퐁낭’처럼 누구나 와서 쉬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의 정체성을 블루보틀에 부여했습니다.
에리어플러스,
한남과 광화문

여기까지 블루보틀이 디자인 스튜디오에 공통적으로 ‘지역의 특색’을 녹여 내길 요구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 에리어플러스는 한강, 남산, 청계천과 같이 자연의 요소에서 지역적 특성을 발견했습니다. 한남에서는 한강에 비치는 윤슬을, 광화문에서는 청계천의 흐름을 구현했는데요. 블루보틀 한남은 천장 조명으로 한강에 반짝이는 윤슬을 표현했고, 삼베의 질감을 드러내는 전통 옻칠 기법으로 제작한 패널을 사용해 한국적인 미감을 더했습니다. 공간, 가구, 공예를 아우르는 에리어플러스의 개성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광화문에서는 공간의 구조를 통해 지역적 특색을 표현했는데요. 청계천이 흐르듯이 카운터를 따라 걷도록 고객의 동선을 설계했습니다. 중앙의 기둥을 둘러싸고 ㅁ자로 크게 형성된 카운터가 자연스럽게 고객의 동선을 형성합니다. 블루보틀은 지점마다 공간의 구조, 조닝, 동선이 모두 다른데요. 주어진 공간의 조건과 지역적 특색을 반영해 개별적으로 설계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일관된 공간 가이드 속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개성을 획득합니다.
살펴볼수록 블루보틀의 공간은 서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개성을 지닙니다. 블루보틀이 다른 브랜드에 비해 공간 디자이너의 역할에 자유도를 부여한 이유는 브랜드 철학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습니다. 블루보틀은 ‘지역과의 상생’을 강조하며 매장이 위치한 지역의 특색을 강하게 드러내길 바랐습니다. 성수에는 성수의 특색이, 제주에는 제주의 특색이 묻어나죠. 장소적 맥락이 드러나는 공간이 가장 블루보틀다운 공간입니다. 공간에 엄격한 가이드라인은 없지만 지역(로컬)에 대한 브랜드의 철학을 충분히 잘 담아냅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인 스튜디오의 개성과 가치관이 드러나고, 공간의 스토리텔링도 풍부해집니다.
공간의 정체성에 브랜드는 어디까지, 어떻게 개입하면 좋을까요? 디자이너의 해석이 브랜드의 본질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블루보틀의 사례는 브랜드의 공간 전략에 새로운 관점을 던져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