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수용보다는 차별과 배척이 더 쉬운 시대입니다. 올해 초 미국의 종합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전 세계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요. 지속된 경제 침체와 난민 문제로 씨름하던 유럽 곳곳에서는 극우 정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일부 정치인은 극단적인 발언으로 대중을 동원해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닌데요.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혐오 표현을 경험했고, 약 46%가 혐오 표현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비판이 더 쉬운 양극화 시대에 공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여기, 공감의 메시지로 세상을 바꾸려는 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전 세계 시민들과 함께 예술로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 영국의 ‘Empathy Museum’을 소개합니다.
공감으로 세상을 바꾸다

Empathy Museum, 한국어로 ‘공감 박물관’은 2015년 영국에서 시작된 참여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철학자 로만 크르즈나리치(Roman Krznaric)와 예술가이자 큐레이터 클레어 페이티(Clare Patey)의 협업으로 시작된 체험형 예술 공간이죠. 로만 크르즈나리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퍼져 있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첨예한 세계 갈등의 해결책으로 공감을 꼽았는데요.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은 클레어 페이티가 첫 전시 <A Mile in My Shoes>를 선보이면서 공감 박물관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공감 박물관은 일반적인 박물관과 달리 영국부터 벨기에, 미국, 호주, 브라질 등 해외를 돌아다니며 이동형 팝업 형태로 전시를 개최하는데요. 이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공감을 이끌어내며 개인적인 변화부터 편견, 갈등, 불평등 같은 사회적인 문제까지 해결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죠. 공감 박물관은 전통적인 문화 공간에서 벗어나 예술의 역할을 확장하며 연대의 장으로서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A Mile in My Shoes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고발하기 전에 그의 신발을 신고 한 걸음 걸어보세요.”
Just walk a mile in his moccasins before you abuse, criticise and accuse.
_ Mary T. Lathrap, 미국의 작가
<A Mile in My Shoes>는 타인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볼 수 있는 참여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거대한 신발 상자 모양을 한 전시 공간 내부는 신발 가게처럼 꾸며져 있는데요. 롤러스케이트부터 부츠 등 관람객은 원하는 신발 한 켤례를 빌려 신은 뒤, 신발 주인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15분 정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상실부터 슬픔, 희망, 사랑 등 다양한데요. 헤드폰에서는 난민부터 성 노동자, 전쟁 참전 용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낯선 두 발의 생경한 감각은 참여자들을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여정으로 초대하죠.

공감 박물관은 지금까지 14개 국가에서 350여 개의 이야기를 수집했는데요. 이들은 종종 다른 단체와 협업하여 특정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영국 보건 재단과 함께 의료 및 사회 복지 분야 근무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이민 박물관과 협력하여 영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사회적인 이슈까지 담론을 넓히기도 했죠. 작년부터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지역 특색을 반영한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A Mile in My Shoes>는 신발을 매개로 나와 타인의 경계를 허물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연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A Thousand and One Books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피부를 걸쳐보고 그 속에서 걸어봐야 한다.”
You never really understand a person until you consider things from his point of view. Until you climb into his skin and walk around in it.
_ Harper Lee, 미국의 작가*
독서만큼 누군가의 삶을 선명히 상상하며 타인의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A Thousand and One Books>는 1,001권의 책을 보유한 이동식 여행 도서관입니다. 공간 외부는 여러 권의 책이 일렬로 세워진 형태로 디자인되었는데요. 도서관은 2016년 런던 국제 연극제의 일환으로 처음 선보인 이후 해외 도시를 순회하게 됩니다. 책들은 독특하게도 크라우드 펀딩 방식을 통해 수집되었는데요. 공감 박물관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그 책을 선택한 이유를 함께 작성하여 기증할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모든 책은 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감싸져 있어 오직 기부자가 남긴 추천사만을 읽고 책을 선택할 수 있는데요. 책은 대여하거나 근처 의자에 앉아 읽을 수 있고, 심지어 집으로 가져가서 읽은 뒤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죠. 기증된 책들은 온라인에서 추적할 수 있어 각 책을 누가 어디에서 읽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단순한 책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대여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한 뼘 넓히고 타인과 연결되게 됩니다.
공감 박물관의 등장 이후 세계 곳곳에서는 작고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공감 기반 교육이 강화되거나 사회 정서적 학습을 교육과정에 통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대화의 장을 통해 사회 정치적 분열을 완화하는 이동형 전시인 ‘Empathy Tent’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공감박물관은 이렇게 현대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지며 개인과 단체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죠.
언젠가 서점을 둘러보다가 연보랏빛 표지의 한 책을 만났습니다. 책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저자는 동물 연구와 실험 결과를 보여주면서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협력과 친화력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어느 때보다 필요한 건 공감이 아닐까요? 분노와 혐오 대신 다정함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 Empathy Museum 공식 홈페이지
- Now Gallery 공식 홈페이지
- MuseumNext, How Can Museums Foster Empathy and Social Change?, 2024.12.27
- 국가인권위원회, 온라인 혐오표현 인식조사, 2021.05
- Esse, Opacity Against the Abuses of Empathy
-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디플롯,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