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애환을
털어놓는 명작 4권

헐벗은 일상을 나누는
진솔한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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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될 때 세상은 멸망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고단한 일상을 헤집고 들어오는 타인이 장애물처럼 느껴질 때,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럴 때 꺼내 보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이토록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책들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들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재치 있는 입담꾼처럼, 날카로운 프로파일러처럼, 다양한 태도로 인생을 그려낸 작품들을 여러 시대를 훑어 추려봤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바라볼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태도를 곳곳에서 모았다고 할까요. 세상을 향한 공감 에너지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당대 구석구석을 비추어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그려낸 단편 모음집 정수를 추천합니다.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재기발랄한 이야기꾼들의 수다 대결

이미지 출처: 을유문화사

14세기 영국, 런던 템즈 강변의 한 여관에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묻힌 성 토머스 베켓의 무덤으로 향하는 다양한 신분의 순례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정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은 흥미로운 제안을 던집니다. 순례길의 재미를 위해 이야기 내기를 벌여 가장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한턱 내자는 것이죠. 기사, 수녀원장처럼 제법 높은 신분의 사람들부터 요리사, 방앗간 주인, 농부처럼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데요. 낭만적인 로맨스부터 우스꽝스러운 활극, 불륜부터 도덕적 설교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이 책은 마치 중세 판 ‘유 퀴즈 온 더 블럭’ 같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친 시민들을 붙잡아 앉히고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 장면이 떠오르거든요. 사람들이 쏟아내는 풍성한 소재들은 마치 휴먼드라마 혹은 유쾌한 콩트처럼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를 펼치는 화자의 신분에 맞게 주제와 표현이 어떻게 변하는지 포착하는 재미도 있고요. 사람 냄새 물씬 배어나는 30여 회차의 토크쇼를 보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순례라는 공통점으로 모였을 뿐 각자 다른 개성과 욕망을 품은 사람들을 한 무대에 올려놓고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작가 초서가 녹여낸 풍자와 아이러니, 인간의 개성과 보편적인 감정들까지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14세기 영국 사회 모습에 어느 순간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 겹쳐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고전이 주는 감동이지 않을까요?

영국 캔터베리로 떠나는 순례자 중 한 명이 되었다고 가정하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꺼내 놓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이 작품을 보다 다층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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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사회, 인간, 너와 나의 본질을 비추는 매서운 거울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독자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진입장벽일지도 모릅니다. 제목부터 설정까지 어떤 은유가 잔뜩 깔린 듯한데, 손에 잘 잡히지 않거든요. 자꾸 ‘해석’이라는 해부용 칼을 들고 싶어지죠. 그 의욕을 잠재우고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듯 가만히 소설 속 풍경을 따라가 보세요. 전시관에 걸린 그림을 공들여 감상하듯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인물 심리를 꿰뚫고 있는 작가의 빛나는 통찰이 말이죠.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소년부터 지긋지긋한 시궁창을 떠나 새 삶을 떠나고 싶어하는 아가씨, 산전수전 겪은 60대 할머니까지 작가는 수십 번의 인생을 살아본 듯합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더블린 사람들』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15편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영국의 오랜 지배와 기근으로 피폐해졌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짙은 패배 의식과 무기력에 절여져 있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도 없을뿐더러 변화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극소수의 사람들도 작은 역경 앞에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전통을 기리는 세리머니와 정치판 뒤에는 허울 뿐인 명분 뒤에 숨어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즐비하죠. 이 답답한 인물들이 품은 욕망과 주저함, 패배감은 오늘날 각박한 사회를 버티는 우리 마음에 내재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의 무력감에 답답해하면서도 그들을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잔인하리만치 선명한 거울을 들고 조국 아일랜드의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그는 아일랜드의 편린을 사실적으로 찍어낸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아일랜드 독자가 깨어나길 기대했습니다. ‘이대로는 안되는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는 위기의식이 생동하기를 바라며 작품을 집필했죠. 당시에는 조국의 수치스러운 면을 드러냈다며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 아일랜드는 제임스 조이스의 거울 덕분에 조국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며 그의 예술성과 용기에 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더블린 사람들』 속 작품에는 결말이 맺어지지 않아 떨떠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데요, 이는 우리 삶이 소설의 정형대로 일순간 결말지어지지 않고 계속 변모하는 유기체임을 깨우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의 현실을 성급히 결론 짓지 말라고 일깨워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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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뭔가’를 보는 것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대성당』을 읽는 것은 절망의 탄광에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라는 광물을 캐는 일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인 카버가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갖가지 고생을 겪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던 삶의 모양이 투영되어서일까요? 작품 속 인물들의 삶에는 짙은 고단함과 비애, 체념 같은 감정들이 안개처럼 깔려있습니다.

인물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죠. 작가인 카버 자신이 그런 삶을 보냈듯,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냉장고가 고장 났는데 수리 기사 부를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하는 등의 ‘지독한 리얼리즘’이 반영된 가난이죠. 작품 상 설정이라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는데, 어쩐지 까딱 잘못하면 내 삶에도 당장 일어날 법한 모습들이라 기분이 께름칙해집니다.

12편의 소설에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통 문제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 장애와 귓속을 꽉 채운 귀지부터 공간의 분리 같은 요인까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가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장애 요소들은 인물들을 고립시킵니다.

‘고립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을 들으면 은둔자처럼 방 안에만 갇힌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이는 비유일 뿐입니다. 멀쩡히 출근하고 대화하고 여행하면서도 감정의 단절, 교감의 부재가 사람의 삶을 어떻게 회색빛으로 만드는지 보여주거든요. 우리는 이 지독한 설정에서 오늘 하루의 내 모습을 떠올리는 ‘리얼리즘’을 경험하게 됩니다.

카버는 소통의 중요성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고, 듣기 위해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타인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다른 세계에 공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이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놓인 당신, 어떤 방법을 택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이 던지는 듯한 이 책을 덮으면서는 한 번 돌이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더 깊은 절망으로 빠지거나, 감동과 환희를 맛보며 치유된 12편의 소설 속 인물 서사의 차이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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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상처뿐인 삶에, 과연 이야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지 출처: 쓰다

원미동, 멀고 아름다운 동네. 작가 양귀자가 그려 보이는 원미동 주민들의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20대, 30대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국어 교과서에 이 작품 일부가 실려있었으니까요. 형제슈퍼, 원미지물포, 행복사진관처럼 그 무렵 흔했던 이름의 가게들과 동네 골목길에 오가던 대화까지, 우리 동네 풍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릅니다. 외국의 어느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보다 친근히 읽히죠.

작가는 이 작은 동네에서 고만고만한 생활 수준으로 모여 사는 집집에 조명을 비춥니다. 어쩌다 이 먼 곳에 둥지를 틀게 된 가족들의 이야기부터 별것도 아닌 일로 부딪히는 이웃들 간 말다툼, 때늦은 사랑으로 가슴 졸이는 남자와 몇 푼 안 되는 돈을 둘러싼 명암까지. 당장 손에 잡힐 듯 익숙한, 달고 쌉싸름한 삶의 모습을 두루 담았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부박한 삶의 진행을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이주민과 원주민, 공장 지대와 주택가, 인위적인 풍경과 자연적인 풍경이 어우러진 한 동네의 정경에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담고 있다 보니, 원미동 사람들의 모습은 대체로 비관적입니다. 희망과 절망, 폭력과 소외, 갈등과 이해가 이야기마다 수십 번 교차하죠. 작가는 주민들의 눅진한 고달픔을 묵묵히 좇아갑니다. 작품에 창조해 낸 설정들이 자연스레 혼합되어 원미동이라는 한 동네, 나아가 그 시절의 모습이라는 모양새를 완성하도록 의도하면서요. 그래서 독자들은 이 먼 곳에 있는 듯한 아름다운 원미동이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됩니다. 매일 같이 내가 오가는 그 길, 그 동네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말이죠. 그 풍경 속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짐을 지고 저마다의 여정을 쓸쓸히 살아내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삶에 대한 엄숙함이 짙어집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서글프기에 그토록 싸우고, 아프고, 외로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와 타인의 고단함을 이렇게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꿰뚫음으로써 서로를 위로하는 소설이 더 있을까요? 이보다 제격인 작품을 떠올리기 어렵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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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느끼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느끼며 ‘살아가는’ 일은 고달프다.” 양귀자 작가의 말에서 공감의 완성이란 불가능한 이상임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심하고 싶을 때 떠올려보고자 합니다. 세상과 교감하는 힘을 축적해 가는 것은, 세상 위를 이리저리 구르는 나 자신의 고단함도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 건강한 그릇을 빚는 것과 같다고요. 지독한 인생을 묵묵히 그려낸 작가들의 시선에서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서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초탈한 마음을요.

유난스러운 일들이 연속해 밀려오는 새해입니다. 작은 절망감에 쉽게 무력해지지 않고,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도 조금 더 묵묵하게 견디는 사람이 되어보겠습니다. 힘써 존립하고 있는 서로의 고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는 힘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 채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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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고전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방황하고 반항하며 만드는 담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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