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그림책이 좋은 이유는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에선 물건도 동물도 심지어 추상적인 개념도 화자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세계에서 허용되는 상상의 범위가 그만큼 폭넓고 자유롭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상상에 기대야 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못한 존재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어른의 모나고 뾰족한 부분을 억지로라도 문질러 둥글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동물이 화자인 그림책만 보더라도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나와 주변 세계를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을 위해 익숙한 인물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사물과 명확하지 않은 존재의 목소리가 이끌어가는 그림책 3권을 소개합니다. 처음엔 독특한 형식에 먼저 눈이 가지만 책장을 다 넘길 때쯤이면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 뭔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길을 달리는 지하철 2호선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그림책입니다. 화자는 합정, 시청, 성수, 강남을 지나며 2호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헐레벌떡 뛰어와 지하철을 타는 아저씨는 딸 한 번 더 보느라 매일 플랫폼을 달리는 완주 씨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지하철에 오르는 아기 엄마는 겁도 많고 잠도 많고 울기도 많이 울었던 유선 씨입니다. 차갑고 무심한 익명의 시공간처럼 느껴지던 지하철이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릅니다. 더 이상 지하철은 회색 도시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이야기를 싣고 달리며 볼이 붉게 달아오른 정 넘치는 이웃의 얼굴로 보일 것 같습니다.
지하철을 타는 시간은 매일 반복되는 따분한 시간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는 피곤한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객차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쯤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나처럼 지칠 때도 있겠지,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대하고 있겠지, 생각하면 만원 지하철에서 서서 가더라도 조금은 버틸 수 있겠습니다.
지하철의 시점에서 섬세하게 표현한 지하철 역사와 객차 안 풍경, 현실감 넘치는 인물 묘사를 감상하는 것도 이 책의 재미입니다. 잊고 있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권정민

도심에 야생 멧돼지가 출몰했다는 뉴스를 종종 봅니다. 상위 포식자에 번식력까지 강한 멧돼지가 잦은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와 먹이 부족에 시달리며 도심까지 내려오곤 하는데요.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결국 멧돼지는 사살되곤 합니다. 이 그림책은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온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책은 산을 파괴하는 인간 때문에 한순간에 집을 잃은 멧돼지에게 살아남기 위해 명심해야 할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멧돼지를 위한 조언이니 아마 인간의 말은 아니고, 도심에 출몰했다 살아남은 멧돼지 사이에서 이어져 오던 지침이 아닐지 짐작해봅니다. 유머가 넘치는 조언과 대비되는 긴장감 넘치는 그림의 배치가 웃음을 자아냅니다. ‘수상한 녀석들이 나타나면 일단 피할 것’을 추천하며 청계천을 내달리는 멧돼지와 그 뒤를 쫓는 경찰들을 보여주는 식이죠. 하지만 이내 씁쓸함이 따라옵니다. 갈 곳이 없어진 멧돼지가 도시를 헤매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우리가 뉴스에서 보던 인간의 구역을 침범한 멧돼지가 무고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가 난 도로와 트럭에 가득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돼지 떼를 보여주며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화자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은 멧돼지나 인간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집니다. 인간이 더 나쁘다, 멧돼지가 더 나쁘다는 식의 결론이 아니라 동물이든 사람이든 누구도 내쫓기지 않고 공존할 방법은 무엇일지 현실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지침서를 만든다면 어떤 조언을 남길지 생각해 봅니다.


『호텔 파라다이스』
소윤경

‘여행은 커다란 선물 상자’ 같다는 비유로 시작해, 여행에서 만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책은 한 편의 모험 같은 전개를 보여줍니다. ‘호텔 파라다이스’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낙원 같은 공간이자 그 자체로 여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행하며 느끼는 감탄과 즐거움이 있는 한편, 그 이면에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 명의 화자와 반전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줍니다. 낙원이 따로 없는 호화로운 호텔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여행이 펼쳐지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순간,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 번째 화자는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던 기억을 떠올리지만 그의 터전은 개발로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둘의 낙원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죠.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두 번째 화자는 첫 번째 화자에게 너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미래를 잃은 자의 당부였을 겁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두 화자의 대화를 읽으며, 이 책이 그저 환상적인 동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어 세계와 만나는 여행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느꼈습니다. 여행은 현재 남아있는 유물, 문화, 풍경을 통해 소멸한 과거의 인류가 미래의 후손과 만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죠.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기에 과거의 인류가 미래에 말을 건다는 발상은 좀처럼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을지 생각해 봅니다.
책 마지막에는 여행에 대한 작가의 말이 적혀 있습니다. ‘길 위에서 여행자는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얻게 될’ 거라는 말이 책의 주제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와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는 살면서 꽤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죠. 자아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 사회, 세계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공감하는 능력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잘 읽을 줄 알면 사고방식에서부터 말과 행동까지 중심을 잡기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만 들이면 그림책을 통해 매일 타는 지하철이 되었다가 도심에 출몰한 멧돼지도 되었다가 과거에 사라진 사람들도 되어볼 수 있습니다.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시선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새로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직 나 밖에 없던 사고의 중심에 새로운 존재들을 들여놓다 보면 나의 세계는 점점 더 넓어질 것입니다.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내어준 마음의 크기만큼 앞으로 맞이할 하루가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