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정의를 뒤흔드는
하이디 부허

움직이는 조각으로
여성 해방을 외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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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본 적 없는 독특한 작품을 마주한 적이 있나요? 흔히 작품하면 떠오르는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닌, 새로운 매체와 형태의 작품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과연 무엇을 회화, 사진,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또 예술 작품의 정의는 무엇일지 말입니다. 오늘 만나볼 하이디 부허는 우리 모두 한 번쯤 보았을 ‘조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단단한 금속, 나무를 깎은 게 아닌 무언가의 껍질을 뜯어낸 듯 보이는 기묘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이는 이것 또한 조각이라는 것이지요. 하이디 부허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작품을 완성시킨 걸까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독특한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을 만나보세요.


여성으로서의 삶

Dragonfly Costume을 입은 하이디 부허, 1976, 이미지 출처: 하이디 부허 공식 홈페이지, 사진: Thomas Burla

하이디 부허(Heidi Bucher)는 1920년대 스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위스 하면 푸른 초원과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인 삶이 떠오르지만, 당시 스위스 여성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스위스 여성들은 1970년대에 비로소 투표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심지어 이때 여성 투표권을 획득하지 못한 일부 지역은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1920년, 한국이 1948년에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다는 역사와 비교하면, 한참 뒤처진 스위스에서 사는 여성들의 삶이 어땠을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하이디 부허의 집은 여성과 남성의 공간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집안의 여성들은 아버지를 돕고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 분주한 삶을 보냈습니다. 예술의 뜻이 있었던 하이디 부허는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전공 선택에 있어서도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이디 부허는 당시 여성들에게 실용적인 전공으로 권유되던 의상 제작 교육을 전공합니다. 이후 예술가 칼 부허와 결혼해 함께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기도 했지만 독립적인 예술가로 큰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예술가 남편의 조수로만 여겨졌고, 이혼 후 작업을 하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스키닝: 바르고 떼어내기

하이디 부허, Gentlemen’s Study 작업 과정, 1979, 이미지 출처: 하이디 부허 공식 홈페이지, 사진: Hans Peter Siffert

하이디 부허는 여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했습니다. 가까운 가정부터, 더 큰 스위스 사회까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과 억압을 작품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본질적이었던 문제를 탐구하며 스키닝(Skinning)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고안했습니다.

스키닝이란 신체나 사물, 공간에 라텍스나 거즈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바르고, 문질러 떼어내는 작업입니다. 처음에 작품들을 보고 이것들을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조각하면 돌이나 나무, 금속 같은 단단한 소재를 깎아 만든 무게감 있는 모습이 연상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반면 하이디 부허는 스키닝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조각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여성 차별을 뜯어내기

하이디 부허 작품들, 이미지 출처: Venice Biennale, 사진: Italo Rondinella, Paola Ricci

하이디 부허는 여성이 받는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을 고민했습니다. 성별로 구분 짓는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앞치마, 스타킹, 코르셋 등 여성의 의류에 대한 작업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의류를 라텍스를 이용해 스키닝하고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시해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하이디 부허, Herrenzimmer(신사들의 서재), 1979, 이미지 출처: Courtesy Freymond-Guth, Zürich

이후 사물을 넘어 더 큰 규모의 공간으로 작업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자신이 자라온 집 안 아버지의 서재를 스키닝 기법으로 선보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아버지의 서재란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자 풍부한 지식과 내적 성장을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부장적 공간을 뜯어내는 작업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넘어 여성의 진정한 자유를 말했습니다.


 움직이는 조각

하이디 부허의 작품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게 특징적입니다. 어떠한 사물, 공간에 라텍스를 바르고 뜯어낸 작품에는 그곳에 있던 작은 흠과 모양, 작품을 이동하고 전시하며 생긴 다양한 무늬가 남게 됩니다. 바람에 흔들리거나,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새로운 개념의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이디 부허, Landings to wear, 1970, 이미지 출처: 하이디 부허 공식 홈페이지

하이디 부허는 주위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을 넘어 사람이 직접 입고 움직일 수 있는 작품들도 선보였습니다. 마치 옷처럼 걸칠 수 있는 작품은 과연 이것을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가 정의 내린 많은 것들이 과연 정확한 것일지,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는 없을지 생각의 전환을 이끕니다.


WEBSITE : 하이디 부허


하이디 부허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압도적인 크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껍질이 빛바랜 모습은 기이하고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성으로 겪은 고통을 생각하며 온몸을 던져 사물과 공간에 무언갈 바르고 뜯어내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느낀 분노와 울분이 담긴 작품은 사회에 대한 저항을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나아가 스키닝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조각과 예술 작품에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여성 해방을 치열한 방식으로 표현한 하이디 부허를 만나보면서,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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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
삶을 깨트리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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