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중심이 되고
웃으면서 우는 모순적 세계관

제97회 아카데미의 선택
'아노라' 션 베이커의 독창적 스타일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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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가 화제입니다. 영화 <아노라>의 5관왕 성과 때문입니다. 작품상부터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아노라>는 다른 경쟁작들의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으며 적은 후보 지명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이변에 놀랐습니다. 놀라움은 <아노라>가 할리우드 기준 600만 달러(약 87억 원)의 저예산 영화라는 점에서 비롯했습니다. 독립영화가 거대 스튜디오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신선한 바람의 시대를 예고한 것입니다. 더불어 한 해에 개인이 아카데미에서 최다 수상(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4개 부문)을 한 것은 1954년 월트 디즈니 이후 션 베이커 감독이 70여 년 만에 다시 쓴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노라>는 뉴욕의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노라와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의 신기루 같은 로맨스와 파국의 과정을 그린 블랙코미디 영화. 최근 아카데미는 화이트 오스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위기 전환을 꾀해왔죠.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유색인종, 성소수자 등을 작품에서 조명하거나 이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해야 한다는 다양성 조건을 강조했던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아노라>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하네요. 아카데미의 점진적 변화를 상징하게 된 셈입니다.

아카데미에 돌풍을 일으킨 션 베이커지만 이번 성공을 하루아침에 거둔 것은 아닙니다. 션 베이커의 스타일은 <아노라>에서 만개했지만 앞선 대표작 <플로리다 프로젝트>, <탠저린>에서 씨앗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 작품에 새겨진 독특한 인장을 찾아보기로 할까요?


주변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

‘아노라’, 이미지 출처: IMDb

션 베이커는 사회적 소수자와 주변인을 뚝심 있게 바라봅니다. 그의 영화는 주류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불평등, 차별을 간접 경험하도록 합니다. <탠저린>은 트랜스젠더 신디와 알렉산드라가 펼치는 좌충우돌 일상을 관찰하면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그렸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모텔 매직캐슬에 사는 6살 꼬마 무니의 무해한 시선에 기대 미국 빈곤층의 소외와 사회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아이러니하게 고발합니다. 그리고 <아노라>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낸 성노동 문제를 전면에서 묘사합니다.

사각지대를 비추는 태도는 영화 속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종종 주인공을 맴도는 조역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역이 됩니다. <아노라>에서는 아노라와의 충동적 결혼으로 궁지에 내몰린 이반이 도주한 이후 사건의 분기점이 찾아오고, 이반의 부모가 고용한 하수인 3인이 난데없이 아노라의 영역을 장악합니다. 사라진 이반을 찾기 위해 아노라와 동행하는 이방인들의 ‘대환장극’은 웃음 끝에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은 어떤 경계에서 벗어나 외면당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자의 인생,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희노애락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줍니다.


환상적인 주조색과 빛

‘탠저린’, 이미지 출처: IMDb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미지 출처: IMDb

이렇게 션 베이커가 바라보는 대상이 대개 음지로 내몰리는 자인 것에 비해 영화의 스타일은 밝고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쩐지 삶과 대조되는 색감이 영화의 톤을 지배합니다. 화려함, 강한 대비, 높은 채도가 관객의 눈을 현혹시킵니다. <탠저린>의 주황빛,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연보랏빛과 같은 주조색은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합니다. 그래서 외피와 메시지 사이에 형성되는 부조화가 불편함을 계속 남깁니다. 특히 국내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월드를 연상시키는 동화적 이미지와 ‘무지개 어드벤처’라는 키워드를 부각한 감성 탓에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는 방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 그의 작품 분위기를 좌우하는 요소는 빛의 활용. 영화마다 강한 빛이 화면을 잠식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됩니다. <아노라>에서는 보다 섬세한 빛이 주인공의 사정과 내면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해가 지면 일하고 해가 뜨면 잠에 드는 아노라가 사는 집은 철로 옆에 위치해 있고, 그 열악함은 전철이 지나가는 순간 빛과 그림자가 다투듯 방을 번갈아 점유하는 모습으로 전해집니다.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촬영편집

‘탠저린’, 이미지 출처: IMDb
‘아노라’, 이미지 출처: IMDb

실험적인 촬영 형식과 편집은 역동성과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더합니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탠저린>은 시종일관 인물의 동선을 바쁘게 따라갑니다. 남자친구의 추문을 밝히기 위해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신디가 긴박해지는 만큼 관객 역시 숨이 가빠지는 체험을 합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35mm 필름을 사용해 현상된 엽서 느낌을 표현함과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아이폰으로 화면이 넘어가 여러 결말의 여지를 남깁니다. 한편 가운데가 볼록하고 스크린의 양 가장자리로 갈수록 사물이 휘어져 보이는 왜곡된 촬영 이미지는 작품을 통틀어 발견하게 되죠. 뒤틀려 보이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감정을 건드리기로는 편집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노라>는 돌발적인 관계에 빠져드는 아노라와 이반의 시간을 리드미컬하게 컷 전환함으로써 관객을 환각적 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다 의도적으로 특정 감정에 대한 몰입을 끊어내도록 장면이 바뀌며 찬물을 끼얹습니다. ‘꿈 깨’라는 말이 불현듯 스칩니다. 무모한 몰입과 각성은 몇차례 반복되고 마지막에 결국 ‘차갑게 폭발하고야’ 맙니다.


그 밖에도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을 찾는 재미는 넘칩니다. 경쾌한 음악 사용, 특정한 장면이 다른 작품에 유사하게 녹아있는 연출, 섣부른 해결을 제시하지 않는 결말, 캐릭터가 확실한 배우의 반복 기용 등. 션 베이커만의 색다른 결이 점점 견고해지고 있달까요.

션 베이커는 “독립영화를 인정한 오스카에 감사하다”라며 “<아노라>는 인디 아티스트들의 피와 땀, 눈물로 만들었다. 독립영화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수상 소감을 전했습니다. 주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주인공이 된 션 베이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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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단면에서 철학하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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