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의 덕질을
쫓아서

방구석에서 훔쳐보는
최애의 오타쿠 모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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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취향과 애정을 엿보는 일. 그건 때로 낯부끄럽기도,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죠. 하지만 저는 그걸 좋아합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즐겨 보는 콘텐츠도 유명인 및 예술가의 왓츠 인 마이 백, 룸 투어, 장비 소개, … 나아가 인터뷰마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주 좋아하거든요. 이와 같은 콘텐츠를 보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소개하는 애장품이나, 그들이 실제 사용하는 방법을 그저 따라 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 아끼는 물건, 평생 함께하고 싶은 악기, 큰 감명을 받은 작품을 설명하는 그들에게선 전과 다른 모습이 보이고, 또 그 대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곤 하니까요.

지난해 한차례 화제 된 콘텐츠인 <최애의 최애>를 몇 주 전에서야 봤습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멤버 수빈이 출연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아이돌 카라와 그 멤버 규리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저는 앞서 수백, 수천 번 마주한 아이돌 수빈이 아닌 오타쿠 수빈의 매력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머무는 또 다른 오타쿠와 다를 바 없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쏟아내는 그에게서, 순수하고 열정적인 팬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니까요. 이처럼 내가 사랑하는 인물, 내가 동경하는 대상에게도 그 스스로의 아이돌이 존재할 테고, 또 그들은 그 대상의 오타쿠로 자리하겠죠. 이번 글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최애로, 동경의 대상으로, 아이돌로 존재하는 이들이 오타쿠로 존재하는 순간을 살펴보며 그들의 더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어 보려 합니다.


거장 봉준호를 만든
거장들의 목록

불완전한 설명을 덧붙이는 게 무색한 이름이죠. 우리나라 영화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감독 중 하나인 봉준호는 널리 알려졌듯 시네필, 곧 영화를 무척 사랑한 나머지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영화감독이 그렇듯, 봉준호 감독 역시 자신이 영향을 받고 동경하는 작품과 인물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데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동참한 마틴 스콜세지를 비롯해 여러 영화인을 향한 리스펙트를 표한 건 물론, 다양한 매체와 자리를 빌려 영화를 향한 깊은 이해와 열정을 표한 바 있죠. 다만 그의 오타쿠로서 자아는 영화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성격 어디 가지 못한다는 듯, 봉준호 감독은 만화와 축구에도 영화 못지않은 열정을 표하며, 독립영화뿐 아니라 쉬지 않고 연극을 보러 다니며 박해일, 송새벽, 박소담 같은 배우를 캐스팅 한 일화도 유명하죠.

그런 봉준호 감독의 오타쿠 기질이 아주 잘 보이는 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2023년 프랑스의 매체 Konbini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비디오 숍을 구경하는 콘텐츠를 찍었는데요. “봉준호 감독이 비디오 클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70편을 나열했습니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30분 길이의 영상 내내 봉준호는 쉬지 않고 스스로의 애정을 말 그대로 ‘뿜어냅니다’. 이미 6,000개의 DVD를 보유했지만 해당 비디오 숍을 통째로 가져가고 싶다는 그는 수십 편의 작품과 영화감독, 배우 등을 소개하는데요. 20세기 고전 작품부터 최근까지, 또 국가와 언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에 관한 정보 및 자신의 감상을 이어가는 봉준호 감독의 모습에서는 오타쿠로서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김기영 감독부터 시작해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김지운 등 동시기의 한국 영화감독을 소개하고, <미싱타는 여자들>과 같은 국내 영화를 언급하거나, 일본, 대만, 홍콩 등 가까운 아시아 국가의 영화와 인물을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죠. 이 영상에서 비친 봉준호 감독은 거장 감독이라기보다, 꿈의 공간에 들어선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영상 내내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이건 내가 찾고 있던 건데”라는 점에서부터, 영화를 향한 그의 깊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Konbini의 30분짜리 영상은 영화를 둘러싼 각종 야사부터 여러 인물의 긴 필모그래피와 작품에 얽힌 비하인드까지, 봉준호 감독이 자신만의 영화 역사를 도슨트 해주는 감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거장은 스스로 쌓은 거대한 애정과 관심의 산 위에 서있기에 그리 커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장기하와 음반들,
또 장기하의 음악들

앞서 소개한 사례가 영화감독과 비디오 숍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당연히 음악가를 레코드 숍에 던져 놓은 상황 역시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주인공을 공간에 두려 하는데요. 홍대 입구에 위치한 김밥레코즈는 우리나라 음반 애호가들의 성지라고 불립니다. 역사가 아주 길지 않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간을 운영하며 김밥레코즈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해외 국가, 장르, 시기의 희귀 음반을 소개하며 이름을 알렸죠. 또한 홍대에 자리한 만큼,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한국의 인디 뮤지션들과 함께 호흡하며 음악 생태계에 일조했고요. 한차례 이사했지만 여전히 홍대 인근에 위치한 김밥레코즈는 계속해서 불황 소식만이 들리는 국내 음반 업계에서, 애호가와 입문자 모두의 관심을 끌만한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레코드숍에 음악가들의 발길 또한 끊일 리 없죠. 특히 장기하와 얼굴들은 김밥레코즈의 단골손님으로 유명하며, 산발적으로 열리는 김밥레코즈 벼룩시장에도 자주 얼굴을 비치는데요. 몇몇 멤버는 김밥레코즈의 유튜브 채널에서 제작하는 ‘디깅 김밥레코즈’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아티스트를 초대해 레코드숍 내 음반을 소개하는 이 시리즈에는 이민휘, 김사월, 수민&슬롬 등 국내 아티스트부터 Gallant, Geordi Greep 등 촉망받는 해외 아티스트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했죠. 많은 출연자 중 하나인 장기하는 거처를 옮겨 확장한 김밥레코즈에 방문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반과 음악가를 열심히 디깅하고, 그와 관련한 자신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활동을 펼친 만큼 장기하는 국내외 대중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인물인데요. 스톤 로지스, RATM, 스파크스, 도어즈와 같은 해외 유명 록 밴드의 음반을 소개하며 덧붙이는 감상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밴드를 운영하던 그에게 다가선 영감과 영향의 순간을 금세 파악할 수 있죠. 또한 그의 여러 작품에서 느껴지는 과거 한국 대중음악의 향취에서 느낄 수 있듯, 김정미의 음반을 집어 든 장기하는 짧은 문장 안에 작품과 인물을 향한 동경과 사랑을 깊숙이 담아냅니다. 이처럼 스스로에게 묻은 과거 음악의 자국을 더듬으며 그에 얽힌 기억을 풀어내는 장기하의 모습에서, 단순한 애정을 넘어 음악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탐한다

앞서 소개한 영상과 같이, 예술가들이 다양한 공간과 물건을 경유해 자신의 영감과 동경을 표출하는 콘텐츠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저는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가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행위를 가장 좋아합니다. 남의 공간을 엿본다는 쾌감이 없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작업실은 단지 예술가의 업무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가 생활하는 방식, 작업에 수반하는 행위와 태도의 흔적, 나아가 그 사람의 생각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감상을 불러오기 때문인데요. 특히 저는 그들의 작업실에 놓인 여러 장비와 물건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해 그런 작품을 만드는지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또 그들이 매번 자신의 창작을 위해 집어 드는 그 물건에 새겨 둔 이야기에 호기심이 발동하곤 하니까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자신만의 길과 색채를 깊이 만들어가며, 이른바 ‘밴붐온’의 주역이기도 한 밴드 실리카겔의 기타리스트 김춘추는 제가 밴드에서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인물입니다. 그는 단지 밴드 멤버이기보다, 음악과 음향에 대한 이해와 다방면적인 호기심을 토대로 사운드 디자인, 믹싱•마스터링 등 엔지니어로서 활동하고 있죠. 물론 그의 기타 연주와 프로듀싱 실력 또한 아주 뛰어나, 실리카겔뿐 아니라 솔로 활동 및 다른 아티스트와 빈번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소개하는 작업실이라니, 당장 재생할 수밖에 없겠죠.

늘 그렇듯, 작업실의 생김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공간에 새겨진 작업자의 흔적에 눈이 갑니다. 김춘추의 작업실은 노란 벽지의 밝은 분위기 아래, 차분한 듯 다양한 가구와 물건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죠. 마치 그의 솔로 활동명 ‘놀이도감’의 정겹고 목가적인 감정이 부드러운 벽지와 가구의 색에서 비롯된다면,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악기와 음반, 잡동사니가 ‘실리카겔’의 다채롭고도 변칙적인 감각을 촉발하는 것도 같습니다. 또 그가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음반과 악기를 소개할 때는 실리카겔과 놀이도감으로서 김춘추가, 그리고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음향 장비를 소개할 때는 우리모두스튜디오의 엔지니어 김춘추로서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듯한데요. 그의 작업실 투어는 ‘내가 자주 쓰는 악기’를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와 함께 호흡하고 움직이는 팀원’을 소개하는 듯한 인상을, 나아가 ‘음악을 만드는 열정’을 지켜보는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세계적인 시상식을 석권한 영화감독, 국내외 페스티벌을 장악한 아티스트. 때로 우리가 사랑하고, 동경하며,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이들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빛나는 별처럼 느껴지곤 하죠. 하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 애정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는 우리처럼 한없이 뜨거워지는 오타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업을 할 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설명할 때 가장 멋지고 순수해 보인다는 말처럼, 위 영상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그 어느 시상식, 무대, 영상에서 바라본 그들의 모습보다 뜨거운 마음을 표출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영향받아, 그것을 내 것으로 흡수하고 표현하는 멋진 이들을 보고 있자면, 열정과 애정을 원동력 삼아 뛰어난 예술가로 발돋움한 그들에게 또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죠. 한편으로, 내 아이돌에게서, 내가 덕질하는 대상에게서, 오랜 시간 동경하고 영향받은 인물에게서 나와 닮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열과 성을 다해 쏟아내던 나의 덕질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무더운 2025년 여름, 반복되는 하루와 끝없이 요동치는 날씨의 변덕 속에서, 조금은 식어버린 열정을 북돋기 위해, 그리고 뜨거웠던 나의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그 언젠가의 나처럼 사랑하는 무엇을 향한 열기를 뿜어내는 나의 최애를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Picture of 박정호

박정호

텍스트로 텍스트 너머의 맥락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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