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아니죠
번안곡 맞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그 시절 번안곡의 세계

“어, 이 노래…?” 표절을 감별하는 법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접한 적 있어요. 처음 곡을 들었을 때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가 떠오르면서 감상이 느낌표로 끝난다면 오마주 또는 샘플링, 반대로 미심쩍은 물음표로 끝난다면 표절이라는 얘기죠. 그렇다면 ‘번안곡’을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요? 예를 들어 엠씨더맥스의 ‘잠시만 안녕’이 사실 일본 곡이란 걸 알았을 때 말이에요. 반가움의 웃음을 지으셨나요, 아니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나요?

번안곡이란 원곡의 음을 그대로 둔 채 가사만 다른 언어로 바꾼 노래를 뜻해요. 지금은 그다지 흔치 않지만, 1960년대 한국 대중음악 시장이 막 태동할 당시엔 많은 가수들이 번안곡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전설적인 포크 그룹 쎄시봉의 명곡 상당수도 번안곡이고요. 하지만 번안곡은 원곡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표절과는 다른 결을 지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 음악사의 한 흐름으로 자리한 번안곡 가운데 필자가 꼽은 다섯 곡을 소개하려 합니다. 원곡과 비교하며 들어보시고, 반갑다면 이렇게 말해주세요. “아, 이 노래!”


돌고 도는 프라우드 메리호

이미지 출처 : 벅스

조영남 – 물레방아 인생 (1976)
그리고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Proud Mary (1969)

조영남은 송창식, 윤형주 등과 쎄시봉을 대표하는 멤버로, 1968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합니다. 이후 발표한 대표곡 중에도 번안곡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대부분 조영남이 직접 작사한 노래로 그의 개사 센스가 잘 드러납니다. 그는 가사 전체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일부 구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사하는 쪽을 택했는데요. ‘물레방아 인생’도 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원곡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이하 CCR)의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의 가사를 적극 활용했어요.

프라우드 메리는 당시 미시시피강에서 운행하던 외륜선, 즉 노 역할을 하는 큰 바퀴가 달린 배를 지칭합니다. CCR은 이 배를 두고 ‘큰 바퀴가 계속 돌아간다’라는 가사와 함께 그 이미지를 ‘Rollin’, rollin’, rollin’ on the river’라는 후렴으로 표현했어요. 조영남은 이 핵심 라인을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으로 바꿔냈습니다. 반복되는 구간을 제대로 살리면서 한글의 말맛과 의미까지 잡았죠. 아무리 뛰어난 원곡이 있더라도 이런 가사 선택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물레방아 인생’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히트곡이 될 순 없었을 겁니다.


누구라도 시인이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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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숙 –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1979)
그리고 Alain Barrière – Un poète (1968)

배인숙은 친언니와 같이 그룹 펄 시스터즈로 데뷔했습니다. 팝을 연상시키는 신선한 음악과 이미지로 데뷔 초부터 큰 주목을 받아 한때 미국 진출까지 추진했으나, 언니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이는 아쉽게 무산되고 맙니다. 이후 배인숙이 솔로로 낸 첫 앨범의 타이틀이 바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입니다. 이 노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샹송 가수 알랭 바리에르(Alain Barrière)의 곡을 번안한 작품이에요. 원곡 제목 ‘시인(Un poète)’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섬세하고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적인데요. 배인숙 또한 그 정서를 훌륭하게 이어받았습니다. 기타 선율과 한데 어우러지는 가사는 조용히 마음을 울려요. 자우림, 이수영, 이광조 등 여러 후배 가수가 리메이크해 이 곡을 다시 불러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이미지 출처: 벅스

배인숙 – 우리 둘이서 (1982)
그리고 Bill Withers – Just The Two Of Us (1981)

필자의 사심을 조금 보태 배인숙의 노래를 하나 더 소개해 봅니다. 배인숙 3집은 ‘코스모폴리탄-팝’이란 장르적 평가가 붙은 만큼 매력이 선명한데요. 특히 ‘창부타령’과 같은 노래는 민요를 서구적 리듬으로 재해석해 시대를 앞서간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빛나는 창작곡과 더불어 이 앨범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 번안곡입니다. 그중 ‘우리 둘이서’는 지금 들어도 세련된 편곡과 자연스러운 가사가 돋보이는 곡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Just The Two Of Us’를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힙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원곡을 감각적으로 살린 개사가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앨범 속 ‘그 사람 잊을까’도 무척 좋아하는 번안곡이랍니다. 아쉽게도 유튜브에 공식 음원 영상이 없어 링크는 생략하지만,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에선 감상 가능하니 꼭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두 번은 생각 말고
두 바퀴로 가

이미지 출처 : 벅스

김광석 –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995)
그리고 Bob Dylan –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1963)

김광석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뮤지션이죠. 그런데 그가 남긴 노래 가운데에도 번안곡이 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독특한 풍자적 가사로 잘 알려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실은 포크 가수 양병집이 먼저 번안한 노래입니다. 양병집은 밥 딜런(Bob Dylan)의 곡을 개사해 ‘역’이란 제목으로 선보였는데 훗날 김광석이 이를 다시 부르며 첫 소절을 그대로 따 제목을 바꿨다고 합니다. 밥 딜런의 원곡과 양병집의 번안, 김광석의 리메이크를 나란히 들어보면 사뭇 달라진 분위기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원곡의 아르페지오 선율을 충실히 살린 양병집 버전과 달리 김광석은 시작부터 하모니카를 전면에 내세워 한층 빠른 템포로 밀어붙여요. 덕분에 원곡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노래가 재탄생했어요. 자신의 강점을 알고 과감히 드러낸, 비범한 번안입니다. 이제 우린 한 곡을 세 가지 맛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네요.


사랑한다는 말이
왜 이리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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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I love you (2000)
그리고 Ozaki Yutaka – I love you (1991)

왜 재능 있는 사람들은 늘 먼저 떠나가는 걸까요. 요절한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세상이 유난히 야속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일본 버블 시대의 청춘 스타 오자키 유타카(Ozaki Yutaka)는 27세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사망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그리움 속에 남아 있어요. ‘I love you’란 노래는 그가 실제 경험담을 살려 작곡과 작사 모두 직접 맡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가사가 특히 아름다우니 번역 가사를 함께 찾아보시길 추천하고 싶어요. 포지션이 번안해 발매한 버전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편곡이 특징입니다. 여기에 원곡보다 한층 절절해진 가사가 더해지며 2000년대 초 우리가 사랑했던 한국식 발라드를 추억하게 합니다. 두 곡 모두 라이브 영상으로 전하니, 요즘 노래에선 찾기 힘든 감성에 푹 젖어보세요.


번안곡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지금과 같은 역사를 쓸 수 있었을까요? 한때는 외국곡을 따라 부르고, 우리말로 다시 쓰는 게 당연했던 시장이 이제는 ‘K-pop’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문화를 이루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그저 상투적인 격언만은 아닌 듯해요. 어딘가 K-pop 번안곡이 유행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어쩌면 그곳의 다음 세대 음악을 기대해도 좋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음악 밖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죠. 지금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창작의 영역이 있나요? 앞선 선배들의 작품이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져 막막하다면,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에 매달리기보다 ‘번안’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요. 좋은 문장을 자기 말로 옮겨 쓰고 좋아하는 멜로디에 내 이야기를 얹는 식으로요. 그렇게 모방의 벽돌을 차근차근 쌓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의 새로운 언어와 리듬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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