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오후, 집중이 잘 안 될 때나 운전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을 때, 저는 여느 플레이리스트 대신 영화 OST를 재생합니다. 자주 듣는 OST를 모아보니 특정 음악가가 작곡한 음악들이더군요. 바로 한스 짐머(Hans Zimmer) 작곡 영화 음악들입니다.
<라이온 킹>, <델마와 루이스>처럼 ‘이 영화 음악도 한스 짐머가?’ 싶은 장르부터 <캐리비안의 해적>, <다크 나이트>, <맨 오브 스틸>처럼 캐릭터의 개성을 그대로 담아낸 히어로 영화, <인셉션>, <인터스텔라>, <듄>처럼 우주와 거대한 역사의 스케일로 인간을 한없이 작은 존재로 만드는 웅장한 영화에 삽입된 음악까지. 한스 짐머의 터치는 그 영화를 음악으로 기억하게 만듭니다. 방금 거론한 영화 제목들만 봐도 어떠신가요? 한스 짐머의 음악 스펙트럼은 놀랍도록 넓습니다.
한스 짐머의 음악을 틀어두면 평범한 업무가 갑자기 대서사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동차 대신 우주선을 몰고 있는 것 같은 웅장한 설렘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지루한 일상이 영화처럼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되죠. 이렇듯 한스 짐머는 영화와 끈끈하게 얽힌 음악을 만들어 우리 일상을 영화처럼 만드는 작곡가입니다. 영화와 음악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영화 음악이라는 장치의 역할을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사람으로 한스 짐머를 첫 손에 꼽을 수 있죠. 크레딧에서 음악 감독 이름만 보아도 ‘이 영화는 어떤 분위기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 음악적 개성을 구축한 거장이니까요.
오늘은 그의 음악 중 초기에 해당하는 음악부터 가장 잘 알려진 음악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영화의 감정선을 떠올려주는 곡들을 소개합니다. 한스 짐머의 음악을 통해 영화 음악이 일상의 감정을 얼마나 풍부하게 증폭시킬 수 있는지 함께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라이온 킹> OST,
‘Circle of Life’

영화 ‘라이온 킹’하면 바로 떠오르는 오프닝 장면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코끼리, 기린, 새들과 함께 아기 사자 ‘심바’가 들어 올려지는 장면이죠. 아프리카 코러스로 시작되는 소리와 타악기 중심의 흥겨운 리듬, 대규모 합창 구조를 녹인 서사형 음악이 자유로운 야생 초원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첫 20초, 전체 세계관은 단 몇 분으로 설명해주는 장치죠.
원래 디즈니에서는 짧은 오프닝 음악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짐머가 아버지의 죽음 등 개인적인 감정을 떠올리며 훨씬 길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왔다고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완성된 새로운 곡을 재생한 제작진들은 짐머의 음악에 감명을 받고, 음악에 맞춰 영화 오프닝 시퀀스를 전면 수정했습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렇게 희대의 명장면으로 남았죠.
‘Circle of Life’는 엘튼 존(Elton John)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엘튼 존은 가사를 보고 단 1~2시간 만에 메인 멜로디를 피아노로 써 내려갔다고 하는데요. 그가 만든 버전은 전형적인 팝 스타일의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엘튼 존이 만든 팝 멜로디를 받은 짐머는 여기에 아프리카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음악가 레보 엠(Lebo M.)을 섭외해 곡 시작을 알리는 강렬한 제창부를 입히고, 음악 전반에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을 깔았죠. 엘튼 존이 곡의 멜로디를, 한스 짐머가 영화에 맞게 편곡해 전체 스코어를 완성했습니다. 두 거장이 협업해 탄생한 명장면을 감상하며, 명작 ‘라이온 킹’을 처음 보며 전율했던 그 시절의 감정을 떠올려보시죠.
<셜록 홈즈> OST,
‘Discombobulate’

셜록 홈즈는 괴짜 천재입니다. 천재의 머릿속을 따라가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죠. 미로를 헤매는 듯 우왕좌왕 헤매는 듯한 이 음악은 셜록 홈즈가 격투를 시작하기 전 상대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슬로우 모션 장면에서 사용됐습니다. 턱을 가격하고, 팔꿈치를 부러뜨리고, 넘어지는 순간까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하는 홈즈의 생각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음악은 단순히 액션씬의 배경음악이 아니라, 괴짜 천재 홈즈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장치입니다. 음악의 제목인 ‘Discombobulate’는 ‘누군가를 당황시키다, 혼란스럽게 하다, 곤란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유머러스한 동사인데요. 홈즈의 성격이자 곡의 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죠.
셜록 홈즈가 활동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분주하고 복잡하며 혼란스럽습니다. 당시 런던은 사건이 끊이지 않는 범죄 무대이기도 했는데요. 한스 짐머는 이러한 시대 배경까지 음악에 녹여냈습니다.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집시 음악 스타일을 구현하는 아코디언, 바이올린, 치터(Zither)등을 사용했고, 일부러 조율이 어긋난 피아노 소리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피아노를 망가뜨려 불안정하고 낡은 소리를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일화도 있죠. 반복되는 4음 리듬 구조에 불안정한 리듬과 독특한 악기 조합이 얹어져, 천재적이고도 익살스러운 캐릭터 셜록 홈즈가 음악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의 우정

사실 영화 팬이라면 한스 짐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을 겁니다. 매번 웅장한 스케일과 비범한 서사의 작품을 선보이며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한스 짐머는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파트너십을 자랑합니다. 2005년 <배트맨 비긴즈>로 시작된 인연은 <다크 나이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를 거쳐 2017년 <덩케르크>까지 이어졌는데요. 한스 짐머라는 이름을 들으면 곧장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울만큼, 짐머는 놀란 감독의 작품마다 그 영화에 딱 맞는 색채의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첫 합작인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 대신 박쥐의 날갯짓 소리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전자음을 제안했고, <덩케르크>에서는 놀란 감독이 평소 차고 다니던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를 바탕으로 ‘셰퍼드 톤’(끝없이 음이 높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기법)을 사용해 영화 내내 관객의 심박수를 조절하는 듯한 서스펜스를 음악으로 연출하기도 합니다. 짐머의 실험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은 놀란은 <배트맨 비긴즈> 이후 10년 동안 거의 모든 작품을 짐머와 함께했죠.
하지만 2017년 개봉한 <덩케르크> 이후, 놀란의 2020년 작 <테넷>부터 음악 감독이 루드비히 고란손(Ludwig Göransson)으로 교체되었는데요. 놀란과 짐머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한 궁금증이 이어지자 짐머는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놀란 감독이 <테넷>의 음악을 의뢰했을 때, 한스 짐머는 이미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프로젝트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짐머는 어린 시절부터 <듄>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이 소설의 영화화 소식을 듣고 <듄>을 선택했던 것이죠. 팬들의 의문은 ‘듄’이라는 단어를 듣고 곧장 해소되었다고 하네요. 놀란 역시 짐머의 선택을 존중하고 루드비히 고란손을 섭외했고, 고란손 또한 놀란 감독의 차기작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며 놀란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자리잡습니다.
언젠가 두 사람이 다시 뭉칠 날을 기대하며, 두 거장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통해 만들어낸 명곡들 중 결정체로 꼽히는 두 곡을 소개합니다.
<인셉션> OST, ‘Time’

인셉션은 복잡한 영화입니다. ‘꿈의 설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꿈속으로 깊게 내려갈수록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설정을 토대로 시간, 기억,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복잡한 설정답게 배경 음악들도 무척 극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배경 음악 ‘Time’은 이런 영화적 설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곡입니다.
‘인셉션’에는 현실의 한 사건이 여러 꿈의 단계를 거치면서 아주 긴 시간으로 확장되고, 갈등이 점점 극에 치달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설정 상 프랑스 샹송 “Non, Je Ne Regrette Rien”이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는데요. 짐머는 이 곡의 템포를 극단적으로 느리게 변형시켜 전체 사운드 구조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아주 단순한 피아노 28마디가 반복되면서 점점 레이어가 추가되고, 초저음 브라스 사운드가 더해집니다. 마지막에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사운드로 치달으며 정점에 이르죠. 반복되는 코드 위에 악기를 계속 쌓는 방식은 시간이 늘어나는 ‘인셉션’의 구조와 딱 맞물립니다.
특히 이 음악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인 연출을 위해 사용됩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토템인 팽이를 돌립니다. 주인공이 염원하던 장면이 현실이 된 순간, 팽이는 멈출 듯 말듯 위태롭게 흔들리며 관객을 약올립니다. 이 순간은 꿈일까요, 현실일까요? 우주 영화처럼 점점 웅장하게 고조되던 음악은 팽이가 쓰러질듯 흔들리자 아련하게 마무리되고,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인셉션’의 서사 구조를 동일하게 차용하면서 마지막 여운까지 남긴 탓에 음악 ‘Time’은 영화 만큼이나 유명해지게 되었고요.
<인터스텔라> OST,
‘First Step’

<인터스텔라>는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인류의 생존과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주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이라는 가혹한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인간의 경외심과 소중한 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절박함을 함께 그려내죠. 이 거대한 우주적 상상력을 단 하나의 악기로 응축해낸 곡이 바로 ‘First Step’입니다.
이 곡의 탄생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한스 짐머 사이의 전설적인 비하인드가 숨어 있습니다. 어느 날 놀란은 짐머에게 영화의 제목도, 장르도, 시놉시스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단 한 장의 편지만을 건넵니다. 그 편지에는 ‘자녀를 위해 무언가 중대한 일을 하러 떠나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관한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죠. 짐머는 우주 영화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오직 감정의 본질에만 집중했습니다. ‘인터스텔라’에 사용될 음악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짐머가 놀라자, 놀란은 “그게 바로 이 영화의 근본적인 메세지네요.” 라고 즐거워했다고 하네요.
이 음악은 런던 템플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으로 녹음되었습니다. 아주 낮고 조용하게 시작되는 오르간의 단조로운 타건은 마치 우주의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처럼 느껴집니다. 곡이 전개될수록 파이프 오르간의 공기 울림이 점점 거대해지며, 인간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또는 우주의 무게를 청각화하죠.
특히 이 음악은 영화의 핵심인 ‘시간의 흐름’과 ‘재회’를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처럼 선율이 흐르고, 수십 년의 시공간을 건너뛰어 아버지와 딸을 연결하는 장치가 됩니다. 웅장하게 고조되던 음악이 멈추고 고요한 여운만 남는 순간 관객은 깨닫게 됩니다. 이 거대한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힘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것을요.
한스 짐머가 설계한 이 압도적인 사운드의 층위 덕분에 우리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밤하늘을 보며 영화 장면 속 전율을 떠올리게 됩니다.
감명 깊게 본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포스터나 피규어 같은 굿즈를 모으기도 하고, 촬영지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감상평을 남기며 다른 관객들과 토론을 즐기기도 하죠.
영화의 배경 음악을 다시 찾아 듣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영화 음악은 배경을 채우는 요소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토리, 연출,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이자, 영화의 완성을 이끄는 힘이죠. 그래서 특정 장면에 흐르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납니다. 영화를 한 번 더 경험하는 것처럼요.
한스 짐머의 음악은 그 힘이 특히 강한 것 같습니다. 영화의 핵심 감정을 음악으로 설계해,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게 만드는 작곡가니까요. 오늘 소개한 곡들을 다시 들으며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전율을 떠올려 보세요. 음악이 어떻게 영화를 완성하는지, 얼마나 섬세하게 그 역할을 해왔는지를 느끼게 될 겁니다.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 OST를 다시 한번 꺼내 들어보세요. 영화를 기억하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이 될 테니 말입니다.




